보일러

 

보일러가 고장이 났습니다. 특별히 가혹했던 지난 겨울을 잘 버텨주었는데 봄이 되자마자 시름시름 앓듯이 온도조절기에 에러 표시가 반복되더니 결국 혼절하듯이 전원이 나가버렸습니다. 한동안 죽은 듯 있다가 다시 깨어나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또 혼절하고, 샤워하다가 갑자기 찬물이 쏟아져서 깜짝 놀라기를 반복... 결국 보일러 서비스 기사를 모셔다가 진단을 받으니 중요부품인 컨트롤러가 고장 난 것 같다며 산소 호흡기를 채워주듯이 임시로 부품을 교체해주었지만 겨우 호흡만 유지할 뿐 계속 에러 코드 표시를 하며 아프다고 합니다. 조만간 교체해야 할꺼라는 기사의 말에 저의 한숨도 깊어집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보일러의 수명이 보통 8년이라고 합니다. 이 보일러는 2006년에 설치하였으니 벌써 12년이 되었습니다. 보통 수명보다 4년을 더 살아주었으니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만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 그런지 솔직히 서운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보통 80을 산다고 하니 저도 30년 정도 남은 셈입니다. 그런데 과연 방현섭이라 불리는 나는 거꾸로II라는 이름의 귀뚜라미 보일러만큼이나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보일러는 그 자신을 뜨겁게 불태우면서 그 열기로 이웃을 따뜻하게 하고 뜨거운 물로 이웃의 더러워진 몸을 씻어주었지만 과연 나는 그렇게 따스한 사람이었는지, 뜨거운 열정으로 더러워진 이웃을 씻어주었는지, 이제부터라도 남은 30년을 이 보일러처럼 살아갈 수 있을런지도 자신이 없어 그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는 어느 시인의 물음이 떠오릅니다. 수명보다 더 오래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사랑해준 보일러를 이제 떠나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말 못하는 쇳덩어리 기계이지만 떠나보내기 전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 담아 깊이 허리 꺾어 인사 한 번 해야겠습니다. 보일러 제조공이 보일러를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정성 담아 사랑으로 만드셨을 텐데 그 사랑과 정성에 제대로 응답하면서 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보일러를 통해 주신 깨우침을 되새기며 한 걸음이나마 더 앞으로 나아가며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