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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위원회
2018.05.01 20:35

교회력 성서일과 성만찬-교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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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회복해야 할 예배
교회력, 성서일과, 성만찬

 

여는 말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길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否定)의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넘어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개념의 정의를 통해서 아는 방법입니다. 부정(否定)의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 너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아포파틱 신학(theologie apophatique) 혹은 부정신학(theologie negative)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신학은 비잔틴 교부들을 중심으로 4세기에서 14세기까지 찬란한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Evagrius of Pontus),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런가 하면 '개념의 정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을 카타파틱 신학(theologie cataphatique) 혹은 긍정신학(theologie positive)이라고 합니다. 이 신학은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점으로 하는 서방교회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중세기를 통해 꽃피웠습니다. 그리고 근대로 이행하면서 또 하나의 신학적 진전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경험적 실용성의 신학입니다. 이 세 가지 신학은 마치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을 모방한 것처럼, 한 본질의 세 특질을 이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균형 잡힌 신학이란 이렇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 신학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신학적으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예배와 말씀입니다. 크라이튼(J. D. Crichton)은 '전례의 신학' J. D. Crichton '전례의 신학' 박효섭 역 (카리스마타공동체, 1999) P3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구원사는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구약성서의 전 역사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와 파란만장한 여정을 통해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한 역사로 알려져 있다. 메시야 자신과 그의 수난, 죽음, 부활 등의 구원 사업은 구원사의 정점을 이루고 있으며, 성령의 강림과 그 역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만물이 요약되는 종말(eschaton)을 기다리는 것으로 넘겨졌다. 이 모형이 총체적인 크리스천 전례의 기초이다. 구약 성서일과를 통하여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복음 독서에서 절정을 이루는 신약 성서일과의 케리그마 선포를 위한 준비가 된다. 유카리스트는 파스카 축제와 광야의 계약 체결이라는 맥락의 한 가운데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파스카의 신비는 유카리스트의 핵심이며, 아남네시스(Anamnesis)에 의하여 재현되며,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교회는 유카리스트와 기타의 성사들을 거행하는 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완성되는 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도달한다. 강림절에서 오순절에 이르는 전례 주기는, 바로 이 동일한 과정을 따르고 있다." 크라이튼의 이 ‘전례의 신학’에 따르면 ‘성찬과 교회력과 성서일과’는 결코 떼어놓으면 안 되는 예배의 ‘삼위일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력을 따라 공전하며 선포된 성서일과는 반드시 성찬을 통해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도달하게 합니다. 따라서 먼저 교회력에 대해 소개하고, 그에 따른 예배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교회력


   교회력의 다른 표현은 예배력(Litugical Calender)입니다. 2세기경의 산물인데, 이 교회력의 신학적 의미 혹은 목회 실천적 의미를 말한다면 교회력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들을 인지하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행위를 기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교회력의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시간으로 설명되는 케리그마입니다. 교회력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시간적으로 분할하여 음미하게 하고 참여하게 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고, 교회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회상하도록 초대됩니다.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걸으며,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에서 시작하여 그의 오심을 맞이하는 성탄절, 그리고 세상의 빛으로 점점 밝아 오는 그를 바라보는 주현절(현현절)과 그의 수난과 죽으심의 전 과정을 묵상하며 경건과 절제로 사는 사순절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에서 성령강림절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생태적 발걸음, 이것보다 어떻게 더 그분을 가까이에서 현장감 넘치게 바라볼 방법이 있을까요? 따라서 오늘의 교회들은 이 교회력의 공전을 따라 걷도록 초청받고 있습니다.

 

2. 성서일과


   교회력을 따라 낭독되는 성경본문의 일람표를 ‘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Lectionary)라고 합니다. AD 4세기경 만들어진 이 성서일과는 독서를 뜻하는 라틴어의 ‘Lectio’에서 온 말로, 공적인 예배에서 회중에게 낭독하기 위해 질서 있게 정리한 ‘성구집’을 일컫습니다. 강림절 제1주부터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까지, 연간 52주 교회력을 따라 성구를 배열한 ‘주일성서일과’와 연간 365일 동안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매일성서일과’가 있는데, 이것은 3년을 주기로 반복되며 매주 구약성서와 서신서와 복음서에서 말씀을 하나씩 택하여 세 개를 낭독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시편이 매주 성서일과와 함께 주어지지만 루터교를 제외한 나머지 전례적 교회들은 설교 본문의 범주에 포함하기보다는 예배순서의 '응송'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역시 위 세 개의 성서일과와 같은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히 인용하면 보다 시편 저자들의 감성이 한껏 배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일과는 교단마다 조금씩 다른 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교회력에 따라 성서일과를 봉독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인류의 구원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는 기쁨의 소식이다. 신약성서의 4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해 행하신 구원 사업을 전하고, 사도행전과 사도서간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구원 사업을 계승한 사도의 활동과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으며,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종말적 완성을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전례는 성서봉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전하지만 성서 전체를 그대로의 형태로 전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 목록에 의해 각 장을 있는 그대로의 순서로 봉독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관계있는 구절을 성서 전체에 걸쳐 읽는 것이다. 구원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중심으로 신구약을 통해 일관된 것으로 이 구원 역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신비를 더욱 깊이 이해시키기 위해 구약성서와 사도서간과 복음이 봉독되고, 강론으로 그것이 설명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총서 5' 성 바오로 출판사, 152쪽, 이 내용의 보다 심층적인 해설은 같은 책 153쪽 '전례에서 성서의 의미'를 참고하면 된다.


 많은 개신교 전통의 성서학자들의 참여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 완성된 까닭에 오늘날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회들은 이 문헌에서 개정된 성서일과를 공동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당 교회력에 따른 구약성서와 서신서와 복음서 간의 통합적 메시지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앞의 문헌에서 보았듯이 구약성서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원 사업이 기록되어 있고,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하고 있고, 서신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데, 각각의 성서일과를 묵상하다 보면 반드시 그 안에 감추어진 통합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화처럼 감추어져 있는 통합적 메시지’, 목회자는 반드시 그 메시지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통합적 메시지에서 바로 그 주일 설교의 제목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말씀 묵상이 생활화 되어야 합니다. 교회력에 따라 성서일과를 묵상하는 것이 구슬을 모으는 노력이라면, 묵상된 성서일과를 토대로 설교를 기획하고 원고를 작성하는 것은 구슬을 꿰는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과정이 좋아야 구슬이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과정'을 위해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합니다.

2. 해석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묵상에 전념해야 합니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이해하고 설교를 기획해야 합니다.

4. 설교 기획의 예


   2018년 교회력 '부활절 제5주 성서일과'를 토대로 작성한 설교 기획의 예를 보겠습니다. 각각의 성서일과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려면, 한글 파일로 작업해서 출력해 두거나 화면에 띄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설    교   기    획
연월일: 2018년 4월29일
교회력: 부활절 제5주


성서일과 및 개요
신약성서 : 행 8:26-40
서신서 : 요일 4:7-21
복음서 : 요 15:1-8

성령께서 빌립을 보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의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설명하게 하신다. 여기에는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가지가 되는 과정과 열매에 이르는 과정으로서의 말씀의 깨달음(행 8:26-35)과 세례(행 8:36-38)와 성령의 임재(행 8:39)를 보여준다.
요한은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가 사랑의 열매(요일 4:7)임을 보여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속해 있듯이, 사랑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듯이, 그의 가지인 그리스도인을 통해 나타날 때, 세상은 그 열매를 보고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안다.

주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당신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신다.(요 15:1) 주님은 성도를 ‘가지’라 부르시며 당신 안에서 ‘함께’ 참 포도나무가 되도록 당신에게 결합시키신다. 따라서 성도는 가지로서 그리스도와 결합될 때, 참포도 열매를 맺게 된다.


주석 및 설교를 위한 힌트
빌립이 다가갔을 때, 에디오피아 내시의 손에는 이사야의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고(행 8:30), 사 53:7, 8절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말씀을 읽고 있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는 빌립의 도움으로 비로소 ‘고난 받는 종’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세례를 받는다.(행 8:36)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그런데 ‘사랑’을 뜻하는 단어 ‘아가페’ 앞에 관사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하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요”(요일 4:7)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다”(요일 4:8)는 말씀은 존재론 적으로 옳다.
요한은 포도나무와 가지라는 은유를 통해 그리스도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은유는 구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 5:1-7;렘 2:21;겔 19:10-14 등은 하나님이 포도원의 주인이시고, 그 분의 백성은 포도원의 나무임을 가르쳐 준다. 포도원은 농부이신 하나님과 나무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력과의 관계에서 본 본문들의 통합적 요점
부활절 제 5주의 말씀은 ‘거룩한 일치’이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믿음의 가지를 든든히 붙이고(요 15:1-8), 말씀과 성령의 임재 안에서(행 8:26-39)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룰 때, 참된 열매(요일 4:7)를 맺을 수 있다.

제목:  거룩한 일치
목표: 말씀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한다.

서론
오늘 성서일과는 일제히 우리에게 '감정과 정서가 잘 조절된' 사랑의 차원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이방인에 대한 정서적 편견을 극복하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말씀을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세례를 베풀어주는 빌립을 보여주고,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요일 4:7)이라고 역설하며, 성도는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주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랑의 일치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보여주신다.

비고

 

1. 응송에서 시인은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시 22:25)라고 노래한다. 찬송도, 말씀도, 사랑도 주께로부터 온 것만이 참되고 본 된 것이다.

2. 포도나무와 가지 그림을 배너로 만들어 시각적으로 성서일과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본론

신약 : 주의 사자는 빌립을 보낸 가사(Gaza)는 사막으로서, 선교라는 측면에서 비효율적인 장소였다. 그러나 거기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빌립이 이사야의 말씀에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해주자 에디오피아 내시가 수레를 멈추고 빌립에게 세례를 받고 조국으로 돌아간다.(행 8:32-39) 그 후로 에디오피아는 복음화 되어 2천 년의 기독교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복음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 말씀은 우리의 정체를 시원하게 밝혀준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당신과 우리가 둘이 아닌 하나의 존재임을 선언하신다. 포도나무와 가지에 같은 생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듯이, 예수님과 우리가 같은 생명의 파동으로 감싸여 있음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서신 : 가지가 포도나무에 속해 있듯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속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나타날 때, 세상은 그 열매를 보고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가지임을 알 것이다.


결론
우리는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기도 하지만, '미움의 관계'를 맺으며 살기도 한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속한 가지로서, 주님의 살과 피가 흐르는 나로서, 사랑과 생명의 열매 맺기를 소망해 보자.

 

3. 렉시오 디비나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거룩한 독서' 혹은 '성독(聖讀)'이라는 말로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의 핵심 영성훈련 방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듣는 훈련이요, 하나님 말씀을 체화(體化) 하는 훈련이요,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독서로 시작하지만 실제로 그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렉시오 디비나를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12세기의 수도자였던 귀고(Guigo)가 정리한 렉시오 디비나의 4단계(영적 사다리)는 이렇습니다.

 

1. 읽기 | Lectio

   ①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성경을 작게 소리 내어 천천히 읽는다. ②본문의 뜻을 이해한다. ③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으면 거기에 잠시 머물면서 작은 소리로 천천히 반복해서 암송한다. ④마음에 닿았던 성경 구절을 가지고 일상에 돌아가서 끊임없이 되뇌며 묵상한다.

 

2. 묵상하기 | meditatio

   말씀을 반복해서 묵상함으로 그 말씀 안으로 들어간다. 성령을 의지하여 반복해서 읽다 보면 특정 구절이나 말씀의 단편 혹은 단어가 내 마음에 떠오르게 된다. 그 말씀을 붙잡는다.(마13:44, 벧후1:19)

 

3. 기도하기 | oratio

   묵상을 통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기도로서 우리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는 단계이다. 바로 여기에서 '참회의 기도, 간구의 기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4. 관상하기 | Contemplatio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며 어느덧 하나님과 깊은 만남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머무르면 우리는 거기에서 참된 분별을 얻게 되고 하나님 뜻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 4단계의 영적 사다리를 잘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의 분주함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말씀에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은 방해 받지 않는 시간과 장소를 택하는 것이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단계를 꼼꼼히 따라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를 묵상하노라면 어느덧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고도 끈끈한 연대를 이루게 된다. 
 
4. 성만찬

   부정(否定)의 언어를 사용해 개념 너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 즉 아포파틱 신학(theologie apophatique) 혹은 부정신학(theologie negative)의 중심에 예배가 있습니다. 나형석 교수는 그의 책 '감리회 예배 원형과의 대화'에서 "성찬이 없다면 설교는 무익하고 공허하다"면서 그 이유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 없다면(성찬) 단지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만으로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라고 되묻습니다. 나형석 '감리회 예배 원형과의 대화' (좋은 땅) p.8.
 머리와 귀로 들은 설교는 대개 관념으로 머무릅니다. 성찬에 참여해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심으로서 이 관념은 비로소 영적 리얼리즘이 되는 것입니다.

1. 예전의 기원


1) 유월절 만찬(빠스카 축제)        
   예배의 기원은 유월절 식탁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과거에 노예의 땅 이집트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던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인데,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졌던 마지막 만찬이 바로 이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사였습니다. 유월절 식사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어떤 중요한 상황을 전제로 마련된 식탁입니다. 유월절 식사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 노예들이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는 식사이고,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종살이하던 자들이 그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놓여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기념하는 생명의 식탁입니다. 즉 유월절 식사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동일한 희망과 메시지를 그 안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신비로운 식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히브리(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해방의 날을 기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음식만을 나누어 먹는 식탁과는 분명히 구별되었습니다. 이 식탁은 엄숙하고 의미 있는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자리요, 이스라엘 신앙이 전승되는 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먼저 손을 씻고 정결례를 행한 다음에 온 가족이 유월절 식탁에 둘러앉으면 가장이 유월절 축제에 대한 감사와 축복을 선언합니다. 이 때 참석자들은 식사 중 네 번에 거쳐서 물을 탄 포도주를 마시는데 그 중 첫 잔을 마십니다. 그 다음에 유월절 음식이 들어옵니다. 이 음식은 언제나 소박했습니다. 과거 출애굽의 전통에 따라서 식탁에는 반드시 쓴 나물과 무교병이 올라오는데, 히브리어로 '마짜(matza)'라고 불리는 이 무교병은 밀가루를 발효시켜주는 누룩을 전혀 넣지 않고 만든 딱딱하고 거칠은 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딱딱한 빵을 먹으면서 그들은 출애굽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되새겼습니다. 빵이 발효되기를 기다릴 시간도 없이 발효되지 못한 반죽을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고 서둘러서 떠났다는 것을 그들은 이 무교병을 먹으면서 상기하곤 했습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의 정신적 유산인 탈무드 중에서 율법 이외의 우화로 이루어진 학가다(Haggadah)를 읽는데, 어린 자녀의 질문에 대한 어른의 대답형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자녀가 먼저 질문합니다. '오늘의 이 식사는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집안의 어른이 신6:21의 말씀으로 대답해줍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바로의 종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애굽을 내려치시고 우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리고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 출애굽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금의 역사로, 식탁에 둘러앉은 모든 가족들의 가슴속에 새겨집니다.

 

   그 다음 애굽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을 구원하신 것을 회상하면서 할렐(Hallel)이라는 시편 찬가를 부릅니다. 그 다음 두 번 째 물탄 포도주를 마시고 이번에는 양고기가 식탁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은 떡을 떼어서 축복한 후에 가족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 바로 이 시점(時點)에서 당신의 찢기실 살과, 흘리실 피에 대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잔을 마십니다. 이 잔을 흔히 축복의 잔(고전10:16)이라고 부르고 이 잔을 마실 때 또 한 번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할렐(Hallel)'의 후반부인 시114-118편 혹은 115-118편을 부르고 네 번째 잔을 마심으로써 유월절 식사가 모두 끝나게 됩니다.

 

2)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가지셨던 유월절 식탁에 그 기원(起源)을 두고 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이별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감정적인 이별을 하지 않으시고 성경적인 이별을 하셨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고 끝까지 믿음을 잘 지키라고 당부도 하면서 눈물겨운 이별을 나눌 것 같은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나눔으로 이것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이 되게 하셨고, 또 그 순간이 주님의 살과 피로 나눈 최초의 성만찬이 되게 하셨고,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오게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 22:15, 16)

   우리도 대개 이별할 때 식사를 합니다. 식사라는 것은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이고,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한 끼 식사라도 함께 나누고 보내야 덜 섭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만찬을 단지 함께 마음이나 사랑을 나누고 섭섭함이나 달래는 자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식탁으로부터 계승된 이 만찬을 통해 당신의 죽으심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십자가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① 그리스도의 몸 (마26:26, 막14:22, 눅22:15-16, 19)

   예수님께서는 이 식탁을 나누시면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 하나를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먼저 주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느 유월절 식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하시는 말씀에서 유월절 식탁이 새로운 차원을 맞이합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막 14:22)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말씀을 되풀이합니다. 이 말씀은 결코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교훈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지난 20세기 동안 성직자들이 문학적 충실성을 줄곧 보존하면서 이 짧은 말씀을 재생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주님께서 이 말씀에 교회의 본질적인 진리를 담아주신 것이 분명합니다.A 마르샤두 '성서에 나타난 성체성사' 안병철 역 (69쪽)
 즉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 중에 떡을 떼어 나누는 이 의식을 통해서 당신의 죽으심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마지막 만찬사가 세 명의 제자와 바울에 의해 동일하게 언급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만찬과 떡을 떼어주며 남기신 짧은 말씀이 세 명의 제자와 바울의 기억 속에 처음부터 각인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태와 마가가 전해주는 예루살렘 전례나 누가나 바울이 전해주는 안디옥 전례가 표현에서 약간 다릅니다. 주님의 만찬사에 대해서 마태와 마가는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26:26, 막14:22)라고 했고, 누가와 바울은 눅22:19와 고전11:24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중함은 주님의 만찬사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만찬사를 자세히 주시하고 보다 분명한 사실을 전달하고 싶어 했던 사도들의 애정 서린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주님의 몸에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주님의 몸에 그토록 주목했을까요?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몸이 그대로 우리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스도의 피 (마26:27-28, 막14:23-24, 눅22:17, 20)

   예수님께서 잔을 들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붇는 것이라”(눅22:20) 하신 말씀에서 우리를 이 성찬에 초대하신 주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처음 초대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바울은 고전11:23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다.” 라고 이 초대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모든 신자들이 성찬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왜 성찬에 초대받은 자가 복됩니까? 그 이유야 이루 헤아릴 수 없겠지만, 우선 그들은 구약으로부터 전해진 언약의 계승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은 이 피에 대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막14: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 28) 여기에서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표현을 누가는 눅22:20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나 마가 그리고 누가가 한결같이 주님이 흘리신 피를 ‘언약’ 혹은 ‘새 언약’이라는 단어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시작된 구약의 배경을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이 광경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제물로 쓰인 짐승의 피를 붉은 양털과 우슬초에 적셔서 백성들에게 뿌리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이 피를 뿌리면서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 모세가 백성들에게 뿌리는 이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체결된 어떤 약속이었습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심으로 세우실 온전한 구원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마태나 마가 그리고 누가가 선언하고 있는 '언약' 혹은 '새 언약의 피'라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를 단에 뿌림으로써 체결되었던 하나님과의 옛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오늘 성찬에 초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구원의 새 약속’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구원의 새 약속입니다.

 

3. 초대교회의 예배

   초대교회의 예배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원형 그대로 계승해서 재현하고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신자들의 모임 장소가 따로 없었고, 유대인들의 회당을 빌어 사용할 처지도 못 되었기 때문에 가까이 지내는 이웃끼리 적당한 집에 모여서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면서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이 성찬이 저녁 식사 전에 행해졌는지, 식사 중이나 후에 행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그 준비나 절차에 있어서 그리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집례하는 사람은 신자들이 가져온 음식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몸과 피로 성별해서 함께 나누었고 각자 가지고 온 음식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이 예식은 오늘날의 엄숙한 예배나 미사와는 전혀 다른 하나의 잔치였습니다. 그들은 이 예식을 예배나 미사라 부르지 않고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백 플라치도 ‘미사는 빠스카잔치이다’ 분도출판사 53쪽


 즉 그들의 처음 초대교회의 예배는 사랑의 잔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대교회의 예배는 아주 서서히 엄숙한 형태의 예식으로 변모해갔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진 변화는 예배 시간이 저녁에서 아침 시간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저녁에 드려지던 ‘아가페’ 외에 아침 시간에 드리는 기도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 기도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성경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말씀의 예배’와 비슷한 성격을 가집니다. 이러한 아침 기도가 날마다 있었는지, 아니면 어떤 정해진 날에만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매주 주일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아침 시간에 행하던 ‘말씀의 예배’와 저녁 시간에 행하던 성찬 예식 즉 아가페는 대개 3세기까지는 독립된 별개의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3세기를 전후해서 이 두 가지 예식이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즉 저녁에 행하던 아가페 예식이 아침에 바쳐지던 말씀의 예식과 결합된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아가페 예식이 저녁에 거행되었던 것은 최후의 만찬을 지낸 시간과 일치하기 위해서 였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시간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페 예식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옮겨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만찬이 ‘아가페’ 즉 사랑의 잔치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이 예식은 기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따라서 이 기쁜 잔치에서는 당연히 수난과 죽음보다는 주님의 부활이 더 자주 이야기 되었고 또 수난과 죽음은 이미 지나간 사건이고, 고통과 죽음은 부활로서 끝났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만찬 예식은 마땅히 부활을 기념하는 잔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은 수난과 죽음의 시간인 저녁시간보다는 부활이 이루어진 아침 시간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만찬이 아침 시간으로 옮겨지면서 아침에 드려지던 말씀의 예배와 결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상의 변화는 성만찬의 본 의미를 크게 변질시켰습니다. 본래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 행해졌기 때문에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의미가 강조되어져야 하는데, 성만찬의 시간을 아침으로 옮긴 이후부터는 수난과 죽음을 제외하고 부활만 강조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바로 우리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것이 이렇게 최후의 만찬이고, 이 만찬이 3세기 이후로 말씀을 받아들인 것이 변질이라면, 그나마 그 최후의 만찬을 버리고 말씀만 정착시킨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겁니다. 웨슬리는 독립 전쟁이 끝난 뒤 아메리카의 영구 교도들과는 달리 성례전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광야의 주린 양떼’들을 바라보면서 1784년 9월10일 브리스톨에서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 문서가 바로 ‘북미주 감리교도들의 주일예배식’이었는데, 그 내용은 1)공동기도서의 개정, 2)39 종교 강령의 개정, 3)새 교회를 위한 성직서품식순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해 제안되고 발티모어 연회에서 가납, 확인된 이 예전적 예배식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폴 샌더스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매우 강렬한 복음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건주의의 종파적 환경에서 양육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적 예배나 성례전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주례적인 성찬예배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자유주의적 분파의 주장에 더욱 고무되어 기도서에 의한 예배란 진실한 신앙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해롭고도 잘못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둘째, 전도자들뿐만 아니라 신도들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격조 높은 문학 양식에 익숙해 있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수준 높은 교육과 세려된 문화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으며, 들판이나 숲속 혹은 오두막집의 난로가에서 예배가 이루어졌고, 평원지대라 하더라도 기껏해야 통나무로 지은 마을회관 같은데서 예배를 드렸으니 영국의 차분하고 아름다운 예배식이 이런 환경에서 정착되기란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의 ‘주일성찬예배식’을 설명하는 서론 부분에서 “나는 영국교회의 공동기도서보다 성서적이고 이상적인 경건심을 확고하게 표현하는 예배서는 세상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라고 강조했다. 또한 “모든 감리교도들은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만 하며 주의 만찬에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며 십자가의 요의가 성찬식에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1744년 영국 교회에서 주례적 성찬식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매주 성찬식을 고집하며 ‘예전을 가진 교회’, ‘객관적 예배’의 균형을 중요시했습니다. 그가 1784년 미국에 가서 그곳 감리교도들의 너무나 간소화된 예배를 보고 나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렇게 멀리 전통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존 웨슬리 ‘감리교 주일성찬예배식’ 박효섭 옮김(카리스마타공동체) 1994 라고 한 말은 오늘의 감리교회도 음미해 볼 말입니다.

 

2. 현대 개신교 예배 반성

    윌리암 바클레이(Barclay, William)는 자신의 책 ‘성만찬’(이희숙 역, 종로서적)에서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을 인용해, 개신교회 안에서의 성례전의 죽음을 말하면서 “우리는 지금 성례전의 죽음(the death of the sacraments)으로 위협받고 있는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고, “이 성례전의 문제는 바로 개신교회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현대 교회의 분위기를 매우 적절하게 반영해줍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여러 개혁자들이 물려준 예배의 형태를 성서적, 신학적, 전승적 검토 없이 수백 년 동안 답습해 왔으며R.E.Webber, '예배의 역사와 신학', 정장복 역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 1978, p.7.
 무엇이든 간결하게 단순화하는 청교도적 습관과 실용적 고려로 인해 성만찬을 늘 설교 중심적 예배에서 소외시켜 왔습니다.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매주일 성만찬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설교는 항상 성만찬이 지니고 있는 영성적 토대를 대변(代辯) 혹은 보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알멘(von Allmen)은 강조하기를 “말씀의 설교는 사실에 있어서 항상 성례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고, 성례전이 확인되고 표징될 수 있는 목적을 언제나 찾아야 하며 그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확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1982년 리마 예식서의 출현 이후 성만찬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기는 했지만 일부 에큐메니칼 운동진영을 제외하고는 성만찬을 한국교회에서 회복시키는 노력에 부진했습니다.

 

3.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예배 
      리마 예식서(Lima Liturgy)는 1982년 남미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위원회‘ 총회를 위해 마련되었고 거기서 최초로 베풀어졌던 역사적인 세계교회의 공동 성만찬 예식서’입니다. “세례, 성찬, 직제”(Baptism, Eucharist, Ministry : BEM)라는 이름이 붙여진 리마 문서의 “성찬” 부분은 교회들 간에 역사적으로 있어온 성만찬에 관한 신학적 논쟁들을 수렴하고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적 기념비이며 이정표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문서에는 ‘성만찬의 영성’적인 특성들이 모두 6가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1. 성부께 대한 감사와 찬미 (눅22:17, 고전11:24)

2.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ἀναἁμν-ησις)' (눅22:19, 고전11:23-26)

3. 성령의 임재 (요6:53-63)

4. 그리스도와의 연합 (고전6:11)

5.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와 일치 (요17:21-26, 고전12:13)
6. 나눔과 도움 (행2:44-47)

 

4. 맺는 말 & 제언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정장복, 「예배학 개론」, p.201.
 그의 이 말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비오 12세의 1947년의 회칙 'Mediator Dei(하느님의 중재자)'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전례 행위 안에 하느님이신 그 제정자가 교회와 더불어 현존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제단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그 대리자의 인격 안에 현존함과 동시에 특히 성체의 성사 안에 부어진 당신의 힘에 현존하고 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119쪽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제7조’는 이 생각을 발전 시켰으며 또한 전례헌장 실시 평의회는 1967년 발표한 ‘성체 성사의 지침 9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체 신비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해 신자는 주님 자신이 교회의 전례 행사 안에 현존하고 있는 그 방법의 주된 것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그 이름을 위하여 모인 신자의 집회 안에 늘 현존하고 있다.”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120쪽


 물론 전례 헌장에 의하면 성만찬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례 가운데서도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말하고 있으며, 성서 봉독에서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주님께서 세상에 남겨 놓으신 성만찬 예전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적인 요소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이 성만찬 예전을 하나의 실재로 중요시하기보다는 단지 하나의 예식, 더 심한 경우에는 프로그램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성만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샘물과도 같은 영성적 의미들을 바로 이해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재현해 내는 ‘제자의 길’이요, ‘따름’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감’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문 신학자였던 칼 라너는 1965년 12월 12일 있었던 공의회 폐막식 강연에서 "쇄신과 개혁을 위한 하나의 시작을 내딛었을 뿐 그것은 곧 시작의 시작이었다"고 공의회를 평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쇄신과 개혁을 위한 하나의 시작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 시작은 참된 예배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교회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성만찬을 회복하는 것에서 완성된다 하겠습니다. 성공회의 주낙현 신부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계간지인 '대성당지' 부활특집호에 낸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존 웨슬리 사제는 오롯이 성공회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성공회의 개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무슨 제도적인 개혁이나 권위에의 도전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공회의 전통 안에서 '말씀과 성사'라는 기본적인 구원의 방법에 충실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말씀과 성사 앞에서 타성에 젖지 않았고 늘 정직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늘 진지하게 자신의 구원이 참된 것인가, 자신의 고백이 진실한 것인가를 말씀과 성사 앞에 드러내며 물었습니다. 이 개인적인 열심과 진지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귀한 모범이 됩니다." 웨슬리의 후예인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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