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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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ndPhoto_2017_08_16_08_12_59.jpg

 

   우리는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그래서 서로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다. 그것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일일까?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면 남에게 상처를 받기 이전에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상처가 될지 아닐지는 나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즉 상처를 받도록 한 그 행위에 대한 나의 해석여부에 따른 것이다. 상대방은 내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자극을 줄뿐이다. 상대는 강 자극 이건 약 자극 이건 자극을 줬을 뿐이지 상처를 주진 않았다. 즉 그 자극에 대한 나의 해석 여부에 따라 그 자극은 상처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할 뿐이다.  상대는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내가 상처를 받게끔 해석하기 이전엔 아무도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상대가 내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할 뿐이다. 순서는 상대의 자극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내안에서 일어났고 이후에 그 해석과 평가에 따른 상처가 내게 온 것이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해석을 할까? 결과적으로 스스로가 상처를 주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모르는 이유는 이것이 이래야만 행복해 진다는 거짓자아의 움직임이며 또한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 일게다. 그래서 모를 뿐이다. 

 

   어린 유아시절에 우리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한다. 이 경험은 어린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안전을 추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애정/인정을 구하고, 힘/통제를 발휘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욕구가 채워질 때 비로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욕구가 채워진다 하여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행복은 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런 잠시일 뿐 곧 사라지고 만다. 느끼더라도 잠시 일뿐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 같고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감이 다가온다.

   그리고 유치시절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이시기에 어른들의 가치관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자아 가치관이 형성되고 동일시가 이뤄진다. “우리 아버지는 힘쎄” 하면서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가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생존/안전, 애정/인정, 힘/통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동일시한 것에 공격을 당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적대감이나 두려움이 일어나고 분노, 질투, 비탄 등의 괴로운 정서가 우리를 뒤덮게 된다. 이런 내적인 프로그램이 작동하게 되면 이성적 분별이 중지되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성장해가면서도 이와같은 프로그램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음단계로 발달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어린 시절의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청소년과 어른 시절 등 각 발달단계에 맞는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컴퓨터에 들어온 바이러스가 부팅하는 순간부터 작동하는 것처럼, 이놈도 그러하다. 새로운 버젼을 깔려면 먼저 깔린 프로그램을 삭제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 프로그램이 중심에서 작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프로그램을 깔고 있으니 새 프로그램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정적 시기엔 늘 중심에 있는 프로그램이 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몸은 다 커서 어른인데 우리 내면의 세계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며칠 전 아내의 몇 마디에 기분이 상한 적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아내 탓만 했다. 마음이 불편했고 그래서 그 상처를 계속해서 봤다. 내면에 감춰진, 어린시절에 심겨진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었다. 

 

   많은 걸음을 걸은 것 같았는데 여전한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서있는 자리가 달랐다. 서있는 자리가 달라지니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내안에 숨겨진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순간 마음의 불편함이 사라졌다. 봄 햇살에 눈 녹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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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13:49

(시안의신앙)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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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180709_140607778.jpg

 

장마

 

김종제

 

 

한 사나흘

바람불고 비만 내려라

햇빛 맑은 날 많았으니

아침부터 흐려 비내린다고

온누리가 어두워지겠느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구에게 다 젖고 싶은

그 한 사람이 내게는 없구나

평생 줄 사랑을ᆢ

 

 

한 사나흘

장마처럼 그대에게 내릴테니

속까지 다 젖어보자는 거다

 

 

나는 그대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그대는 나에게 인생을 주는군요어느 인도 영화의 대사 중 눈에 띄더군요. 사랑을 감히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혈액형으로 성향을 파악하는 무모한 도전처럼 세간에 떠도는 달콤한 사랑이야기가 전부 일 수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런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를리 없지만, 노래도 사랑타령으로, 드라마도 멜로 타령으로 얼룩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가닿을 수 없는 어떤 고귀한 지점에 사랑을 설정해 놓고 그저 애타게 그리워만 하는 불가촉애를 추구하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부러 모른다고 반복하는 것은 사랑을 안다는 것에 번복을 하고 싶어서 그러니 눈치를 채셨겠지요. 층도 있고 결도 있고,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그 양과 질을 달리하는 사랑을 어떻게 계량화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허나 남녀의 멜로가 아니더라도 우리 안에는 어릴 적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서 무한한 특혜를 받았던 그런 아련한 기억이 무의식에 기반이 되어 있어서 흠뻑 받았으니 흠뻑 주고 싶은 마음도 안에 메아리로 맴도는 것도 그리 상스런 일이 아닐 듯 합니다.

 

 

저는 가끔 비에 젖을 때, 과장을 보태면 어머니 뱃속 안에 양수에 감싸있는 느낌이랄까요.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있습니다. 내린 비 고스란히 맞고서 일정시간 지나면 뜨듯한 체온이 폴리에스테론과 살결 사이에서 지글지글 끓으면서 훈훈해지는 그런 순간에 어머니 뱃속에 젖어 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어머니의 그것이 으로 시작하는 것이 어쩌면 비가 는 것과 같은 말품인지 괜한 미스터리를 가져봅니다. 여하튼 사랑은 그렇게 진하고 오랜 기억을 되살리고 세상에서 가장 포근함을 부활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나이가 먹어가면서 왜 남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더 그리워지는지 청승입니다. 그 내막을 좀 살펴보면 우린 거기서 출발해서 거기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머니로 와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게 인생 한 바퀴 아닐까요.

 

 

하느님의 사랑도, 거기서 왔는데 이내 까마귀에게 기억을 내주고 깜깜했지만 다시 그분에게 젖고 싶은, 그 분의 엄숙함 뒤 켠에 놓인 숨겨진 그 소파에 좀 앉고 싶은 것이에요.

 

 

한 사나흘 이렇게 장마가 내리는 날, 더듬더듬 잊었던 사랑을 좀 찾아보고, 깨졌던 마음도 살펴보고, 땜 빵을 하던 미장을 하던 고 싶습니다. 어머니 꼭지도 다시 물고 싶고요. ‘속 까지 다 젖어 보자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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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21:40

거듭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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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_IMG_1475464761417.jpg

 

거듭나야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거듭남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을 볼 수 있는 것.

거듭남과 천국과 봄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거듭나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다 거듭났는가?

 

거듭남이라는 사건은 우리 신앙의 과정에 있는 세례와 믿음의 수용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일차적으로 믿음의 수용을 거듭나는 사건이라 생각했고, 세례로 그것을 상징했다. 

왜냐하면 거듭난다는 것은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의 바탕은 믿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가졌다는 교인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사들 까지,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마저도 거듭나지 못한 것 같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들을 그들이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새로운 과정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것 보다는 믿음을 받아들인 이후의 과정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천국은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으며, 그때 보여 지는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일게다.

그런데 그분의 통치하지 않는 곳이 어디이며 그분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인가?

그분의 살아있음을 믿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곳, 그곳이 하나님 나라라면 이 세상은 그 어디나 다 하늘나라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알아차리며 살아가는가?

그것은 관상적인 삶, 그분의 현존을 깨닫고 그 현존 안에 머무는 삶일 게다.

그분이 내가 있는 이곳에 지금 계심을 알아차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며, 그런 삶이 이뤄질 때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볼 수 있다!

 

거듭남은 일회적 사건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지속적인 사건인가?

과문한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만일에 영혼의 ‘어두운 밤’이 우리가 거쳐야 할 일회적인 과정이 아니라면 거듭남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게다.

거듭남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면 그 첫 번째 사건은 믿음의 수용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거듭남은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가?

물론 한번으로 마쳐지는 특별한 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커다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고 산다.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심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분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분을 잊고 또한 잃어 버렸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그분을 다시 찾아야 하고, 되새겨야 하고, 그분과 다시 이어져야 할게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심을 알아차리고, 그분이 각 사람 사이에 무언가 움직이고 계시며, 다른 어디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음을 볼 수 있을 때,  바로 이때가 거듭날 때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볼수 있으며 이미 그의 나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걸까?

우리가 갖고 있는 현재의 습관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껍데기 자아가 우리의 변화를 가로 막고 있다.

왜?

그 변화는 무엇으로의 변화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막고 있는가?

 

우리의 궁극적 변화는 본래적인 나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창조의 목적대로 존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 부터 와서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면, 우리가 가는 길도 하나님과 함께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이 되어 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가로 막았던 걸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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