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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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눈부신 봄날에

 

                        김후란

 

봄이면 모든 것이

거듭 나기를 기원한다.

 

새벽녘 훈훈한 바람 속에

새롭게 일어선다.

 

뒤척이는 몸짓으로

그리운 언어를 띄우거나

비상하는 기쁨으로

살아 있음을 노래하는

 

이 눈부신

눈 뜨임

 

소근대는 풀잎처럼

솟구쳐 나르는 새떼처럼

황홀한 연출의 시작이다.

 

++++++++++++++++

 

2018년 4월을 지나며 

이제 우리는 안다

누가 알맹이고 누가 껍데기인지

다시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제발 모든 껍데기는 가라

 

아픔은 평화로 오고

눈물은 진실을 불러오는데

눈부시게 푸른 부활은

어디에서 오는가

 

소근데는 풀잎들

솟구쳐오르는 새떼들

저 맑고 순결한 찔래꽃

아. 저 푸른 산에서 온다

 

(0430. 가재울에서 지리산)

 

이 시와 명상은 양재성 목사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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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ndPhoto_2017_08_16_08_12_59.jpg

 

   우리는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그래서 서로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다. 그것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일일까?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면 남에게 상처를 받기 이전에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상처가 될지 아닐지는 나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즉 상처를 받도록 한 그 행위에 대한 나의 해석여부에 따른 것이다. 상대방은 내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자극을 줄뿐이다. 상대는 강 자극 이건 약 자극 이건 자극을 줬을 뿐이지 상처를 주진 않았다. 즉 그 자극에 대한 나의 해석 여부에 따라 그 자극은 상처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할 뿐이다.  상대는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내가 상처를 받게끔 해석하기 이전엔 아무도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상대가 내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할 뿐이다. 순서는 상대의 자극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내안에서 일어났고 이후에 그 해석과 평가에 따른 상처가 내게 온 것이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해석을 할까? 결과적으로 스스로가 상처를 주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모르는 이유는 이것이 이래야만 행복해 진다는 거짓자아의 움직임이며 또한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 일게다. 그래서 모를 뿐이다. 

 

   어린 유아시절에 우리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한다. 이 경험은 어린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안전을 추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애정/인정을 구하고, 힘/통제를 발휘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욕구가 채워질 때 비로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욕구가 채워진다 하여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행복은 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런 잠시일 뿐 곧 사라지고 만다. 느끼더라도 잠시 일뿐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 같고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감이 다가온다.

   그리고 유치시절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이시기에 어른들의 가치관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자아 가치관이 형성되고 동일시가 이뤄진다. “우리 아버지는 힘쎄” 하면서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가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생존/안전, 애정/인정, 힘/통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동일시한 것에 공격을 당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적대감이나 두려움이 일어나고 분노, 질투, 비탄 등의 괴로운 정서가 우리를 뒤덮게 된다. 이런 내적인 프로그램이 작동하게 되면 이성적 분별이 중지되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성장해가면서도 이와같은 프로그램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음단계로 발달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어린 시절의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청소년과 어른 시절 등 각 발달단계에 맞는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컴퓨터에 들어온 바이러스가 부팅하는 순간부터 작동하는 것처럼, 이놈도 그러하다. 새로운 버젼을 깔려면 먼저 깔린 프로그램을 삭제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 프로그램이 중심에서 작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프로그램을 깔고 있으니 새 프로그램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정적 시기엔 늘 중심에 있는 프로그램이 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몸은 다 커서 어른인데 우리 내면의 세계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며칠 전 아내의 몇 마디에 기분이 상한 적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아내 탓만 했다. 마음이 불편했고 그래서 그 상처를 계속해서 봤다. 내면에 감춰진, 어린시절에 심겨진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었다. 

 

   많은 걸음을 걸은 것 같았는데 여전한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서있는 자리가 달랐다. 서있는 자리가 달라지니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내안에 숨겨진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순간 마음의 불편함이 사라졌다. 봄 햇살에 눈 녹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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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0 21:44

빌어 먹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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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dPhoto_2016_12_25_08_41_36.jpg

 

빌어먹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족속(天孫族)이라 한다. 하늘족속인 우리 민족에 있어서 가장 큰 야단은 아마도 “이놈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일게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늘 마음속에 담고 살아온 것 같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무슨 짓을 하고 있냐?”는 말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곤 했다.
   그리고 욕중의 욕은 “예이 빌어먹을 놈아!” 일게다. 사람이 오죽 못났으면 제 손을 움직여서 먹지 않고 남의 손에 빌부터 빌어먹느냐는 것이다. 거지들이나 빌어  먹는 것이지 온전한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자립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자립하고 자급하지 못하는 나라는 남의 손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그렇다. 
 
   나를 돌아보니 평생을 빌어먹고 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늘 이것이 마음에 걸렸다. 천성이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색했다. 그래서 도움의 손길을 주겠다고 한 것을 거절한 적도 많았다. 내가 도움을 주면 주었지 내가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이 싫었다. 무언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누군가를 도울 때 인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그것도 능력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자존심이 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늘 교회의 후원을 요청하곤 했다. 농촌선교를 위하여 후원을 요청했다. 많은 분들이 좋은 마음으로 후원을 해줬는데 때론 속이 상하기도 했다. “차목사, 언제까지 남의 후원으로 살아 갈꺼야? 빨리 자립해야지.” “머리가 허연 사람이 언제까지 도와달라고 할꺼야?” 하며
안타까운 둣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나의 인격이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겉으론 웃음를 잃지 않았지만 속에선 부글부글 하곤 했다. 
 
   그런데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빌어먹고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살아간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아졌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내가 잘못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리소리는 누구의 소리인가’ 하고 물었던 선배가 있었다. 피리소리는 피리의 소리인가? 그렇지 않다. 피리소리는 그 피리의 소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사람의 소리다. 사람이 불지 않으면 피리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피리라도 말이다. 피리는 다만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도 도구일 뿐이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남에게 빌지 못한다. 자존심이 있는데 어떻게 용서해달라고 빌 수 있으며 도와달라고 빌 수 있을까? 그래서 수도자들이 탁발수도를 한 것 같다. 자기의 껍데기를 벗기 위하여, 자신의 자아를 부수기 위하여 남에게 빌어먹는 수도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힘으로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한순간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 우리의 갖고 있는 생각도 나의 것이 아니다. 부모를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들에 핀 꽃들도 우주 자연의 조화로움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도 그러하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는 살수 없듯이 우리도 그러한다. 
 
   남에게 빌어먹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이다. 자아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얼마 전 업무를 대행해주는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시간을 내서 모르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못해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달 업무대행비를 내지 않기 때문이란다. 빨리 업무대행비를 내서 떳떳하게 하란다. 실은 그 사무실 책임자가 업무대행비를  우리에게 매달 증자형식으로 후원하는 것이었는데 실무자들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기 까지는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얼굴이 화끈해졌고 할 말을 잃었다.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고, 하여튼 속이 상했다. 순간  내 껍데기가 보였다. 내 자아가 살아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이것이 부끄러웠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껍데기에 끌려 다니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 자아가 살아 움직여 그런 말에 얼굴을 붉히고 속이 상해야 했던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런 말을 들어도 한결같음을 유지할 수 있을 때는 언제쯤이나 가능할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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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흥도 2018.06.18 08:30

    빈배는 차흥도의 닉네임 입니다!

     


2018.06.28 21:40

거듭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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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_IMG_1475464761417.jpg

 

거듭나야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거듭남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을 볼 수 있는 것.

거듭남과 천국과 봄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거듭나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다 거듭났는가?

 

거듭남이라는 사건은 우리 신앙의 과정에 있는 세례와 믿음의 수용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일차적으로 믿음의 수용을 거듭나는 사건이라 생각했고, 세례로 그것을 상징했다. 

왜냐하면 거듭난다는 것은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의 바탕은 믿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가졌다는 교인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사들 까지,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마저도 거듭나지 못한 것 같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들을 그들이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새로운 과정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것 보다는 믿음을 받아들인 이후의 과정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천국은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으며, 그때 보여 지는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일게다.

그런데 그분의 통치하지 않는 곳이 어디이며 그분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인가?

그분의 살아있음을 믿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곳, 그곳이 하나님 나라라면 이 세상은 그 어디나 다 하늘나라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알아차리며 살아가는가?

그것은 관상적인 삶, 그분의 현존을 깨닫고 그 현존 안에 머무는 삶일 게다.

그분이 내가 있는 이곳에 지금 계심을 알아차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며, 그런 삶이 이뤄질 때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볼 수 있다!

 

거듭남은 일회적 사건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지속적인 사건인가?

과문한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만일에 영혼의 ‘어두운 밤’이 우리가 거쳐야 할 일회적인 과정이 아니라면 거듭남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게다.

거듭남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면 그 첫 번째 사건은 믿음의 수용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거듭남은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가?

물론 한번으로 마쳐지는 특별한 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커다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고 산다.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심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분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분을 잊고 또한 잃어 버렸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그분을 다시 찾아야 하고, 되새겨야 하고, 그분과 다시 이어져야 할게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심을 알아차리고, 그분이 각 사람 사이에 무언가 움직이고 계시며, 다른 어디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음을 볼 수 있을 때,  바로 이때가 거듭날 때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볼수 있으며 이미 그의 나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걸까?

우리가 갖고 있는 현재의 습관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껍데기 자아가 우리의 변화를 가로 막고 있다.

왜?

그 변화는 무엇으로의 변화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막고 있는가?

 

우리의 궁극적 변화는 본래적인 나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창조의 목적대로 존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 부터 와서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면, 우리가 가는 길도 하나님과 함께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이 되어 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가로 막았던 걸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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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9 10:04

받아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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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86904046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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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여라

 

   사람사이의 갈등은 판단하는데서 나온다는 점은 지난번에 이야기한바 있다. 인간의 판단은 상대의 모자람만 보게 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 판단은 상대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갖게 하여 상대를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갈등과 대립은 증폭된다.

 

   우리는 상대가 자신을 받아들이기만 요구하지 상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댄다. (물론 이것도 판단의 결과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을까? 그것은 바다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똥이건 오줌이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다 받아들인다. 다 받아들여서 ‘바다’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모든 것을 평평하게 한다. 그래서 가장 넓다. 이런 이유로 다들 바다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 어떻게 바다는 다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것이다. 물은 흐름을 거역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바다는 가장 아래인 바닥에 있기 때문에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못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 내가 그 상대보다 위에 있다는 이야기다. 자신을 상대보다 낮은 자리에 두게 되면 상대를 저절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지위고하나 빈부의 차이도 아니며 지식의 높고 낮음과도 관계가 없다. 다만 자신의 위치를 상대보다 높게 두느냐 아니면 낮게 두느냐의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곳으로 오신 분이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기 위해서, 사람의 자리가 아닌 말의 먹이통에서 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얼마 전, 아는 친구로부터 내가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들었다. 과거에도 이런 유의 말들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속이 많이 상했고 기분도 나빴다. 상대가 마냥 괘심하게 보였다. 

 

   ‘어떻게 해야지?’, ‘그놈의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야단을 칠까’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그의 잘못을 끄집어내는 순간, 판단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내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내가 그보다 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그렇게 판단하지 말자고, 받아들이자고 이야기 하고 다녔는데 정작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나의 판단을 놓았다. 그러자 문제가 사라졌다. 문제는 상대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판단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었다. 이어서 내 위치도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가 내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절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판단하고, 늘 자신을 상대보다 높은 자리에 두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상대의 부족함만을 이야기하고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변화되어야 할 대상은 바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합리화하고 상대만을 변화시키려 한다. 

 

   참으로 불쌍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이다. 종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자유한 사람이 되라고...... “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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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흥도 2018.08.29 10:04

    한 10년 전쯤 <농촌과선교>에 실렸던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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