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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족속(天孫族)이라 한다. 하늘족속인 우리 민족에 있어서 가장 큰 야단은 아마도 “이놈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일게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늘 마음속에 담고 살아온 것 같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무슨 짓을 하고 있냐?”는 말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곤 했다.
   그리고 욕중의 욕은 “예이 빌어먹을 놈아!” 일게다. 사람이 오죽 못났으면 제 손을 움직여서 먹지 않고 남의 손에 빌부터 빌어먹느냐는 것이다. 거지들이나 빌어  먹는 것이지 온전한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자립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자립하고 자급하지 못하는 나라는 남의 손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그렇다. 
 
   나를 돌아보니 평생을 빌어먹고 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늘 이것이 마음에 걸렸다. 천성이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색했다. 그래서 도움의 손길을 주겠다고 한 것을 거절한 적도 많았다. 내가 도움을 주면 주었지 내가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이 싫었다. 무언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누군가를 도울 때 인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그것도 능력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자존심이 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늘 교회의 후원을 요청하곤 했다. 농촌선교를 위하여 후원을 요청했다. 많은 분들이 좋은 마음으로 후원을 해줬는데 때론 속이 상하기도 했다. “차목사, 언제까지 남의 후원으로 살아 갈꺼야? 빨리 자립해야지.” “머리가 허연 사람이 언제까지 도와달라고 할꺼야?” 하며
안타까운 둣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나의 인격이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겉으론 웃음를 잃지 않았지만 속에선 부글부글 하곤 했다. 
 
   그런데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빌어먹고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살아간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아졌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내가 잘못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리소리는 누구의 소리인가’ 하고 물었던 선배가 있었다. 피리소리는 피리의 소리인가? 그렇지 않다. 피리소리는 그 피리의 소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사람의 소리다. 사람이 불지 않으면 피리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피리라도 말이다. 피리는 다만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도 도구일 뿐이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남에게 빌지 못한다. 자존심이 있는데 어떻게 용서해달라고 빌 수 있으며 도와달라고 빌 수 있을까? 그래서 수도자들이 탁발수도를 한 것 같다. 자기의 껍데기를 벗기 위하여, 자신의 자아를 부수기 위하여 남에게 빌어먹는 수도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힘으로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한순간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 우리의 갖고 있는 생각도 나의 것이 아니다. 부모를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들에 핀 꽃들도 우주 자연의 조화로움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도 그러하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는 살수 없듯이 우리도 그러한다. 
 
   남에게 빌어먹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이다. 자아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얼마 전 업무를 대행해주는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시간을 내서 모르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못해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달 업무대행비를 내지 않기 때문이란다. 빨리 업무대행비를 내서 떳떳하게 하란다. 실은 그 사무실 책임자가 업무대행비를  우리에게 매달 증자형식으로 후원하는 것이었는데 실무자들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기 까지는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얼굴이 화끈해졌고 할 말을 잃었다.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고, 하여튼 속이 상했다. 순간  내 껍데기가 보였다. 내 자아가 살아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이것이 부끄러웠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껍데기에 끌려 다니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 자아가 살아 움직여 그런 말에 얼굴을 붉히고 속이 상해야 했던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런 말을 들어도 한결같음을 유지할 수 있을 때는 언제쯤이나 가능할지 갑자기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