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말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길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否定)의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넘어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개념의 정의를 통해서 아는 방법입니다. 부정(否定)의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 너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아포파틱 신학(theologie apophatique) 혹은 부정신학(theologie negative)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신학은 비잔틴 교부들을 중심으로 4세기에서 14세기까지 찬란한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Evagrius of Pontus),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런가 하면 '개념의 정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을 카타파틱 신학(theologie cataphatique) 혹은 긍정신학(theologie positive)이라고 합니다. 이 신학은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점으로 하는 서방교회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중세기를 통해 꽃피웠습니다. 그리고 근대로 이행하면서 또 하나의 신학적 진전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경험적 실용성의 신학입니다. 이 세 가지 신학은 마치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을 모방한 것처럼, 한 본질의 세 특질을 이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균형 잡힌 신학이란 이렇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 신학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1. 교회력
교회력의 다른 표현은 예배력(Litugical Calender)입니다. 2세기경의 산물인데, 이 교회력의 신학적 의미 혹은 목회 실천적 의미를 말한다면 교회력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들을 인지하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행위를 기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교회력의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시간으로 설명되는 케리그마입니다. 교회력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시간적으로 분할하여 음미하게 하고 참여하게 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고, 교회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회상하도록 초대됩니다.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걸으며,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에서 시작하여 그의 오심을 맞이하는 성탄절, 그리고 세상의 빛으로 점점 밝아 오는 그를 바라보는 주현절(현현절)과 그의 수난과 죽으심의 전 과정을 묵상하며 경건과 절제로 사는 사순절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에서 성령강림절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생태적 발걸음, 이것보다 어떻게 더 그분을 가까이에서 현장감 넘치게 바라볼 방법이 있을까요? 따라서 오늘의 교회들은 이 교회력의 공전을 따라 걷도록 초청받고 있습니다.
2. 성서일과
교회력을 따라 낭독되는 성경본문의 일람표를 ‘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Lectionary)라고 합니다. AD 4세기경 만들어진 이 성서일과는 독서를 뜻하는 라틴어의 ‘Lectio’에서 온 말로, 공적인 예배에서 회중에게 낭독하기 위해 질서 있게 정리한 ‘성구집’을 일컫습니다. 강림절 제1주부터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까지, 연간 52주 교회력을 따라 성구를 배열한 ‘주일성서일과’와 연간 365일 동안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매일성서일과’가 있는데, 이것은 3년을 주기로 반복되며 매주 구약성서와 서신서와 복음서에서 말씀을 하나씩 택하여 세 개를 낭독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시편이 매주 성서일과와 함께 주어지지만 루터교를 제외한 나머지 전례적 교회들은 설교 본문의 범주에 포함하기보다는 예배순서의 '응송'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역시 위 세 개의 성서일과와 같은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히 인용하면 보다 시편 저자들의 감성이 한껏 배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일과는 교단마다 조금씩 다른 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교회력에 따라 성서일과를 봉독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인류의 구원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는 기쁨의 소식이다. 신약성서의 4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해 행하신 구원 사업을 전하고, 사도행전과 사도서간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구원 사업을 계승한 사도의 활동과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으며,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종말적 완성을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전례는 성서봉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전하지만 성서 전체를 그대로의 형태로 전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 목록에 의해 각 장을 있는 그대로의 순서로 봉독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관계있는 구절을 성서 전체에 걸쳐 읽는 것이다. 구원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중심으로 신구약을 통해 일관된 것으로 이 구원 역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신비를 더욱 깊이 이해시키기 위해 구약성서와 사도서간과 복음이 봉독되고, 강론으로 그것이 설명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총서 5' 성 바오로 출판사, 152쪽, 이 내용의 보다 심층적인 해설은 같은 책 153쪽 '전례에서 성서의 의미'를 참고하면 된다.
1.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합니다.
2. 해석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묵상에 전념해야 합니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이해하고 설교를 기획해야 합니다.
4. 설교 기획의 예
2018년 교회력 '부활절 제5주 성서일과'를 토대로 작성한 설교 기획의 예를 보겠습니다. 각각의 성서일과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려면, 한글 파일로 작업해서 출력해 두거나 화면에 띄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당신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신다.(요 15:1) 주님은 성도를 ‘가지’라 부르시며 당신 안에서 ‘함께’ 참 포도나무가 되도록 당신에게 결합시키신다. 따라서 성도는 가지로서 그리스도와 결합될 때, 참포도 열매를 맺게 된다.
1. 응송에서 시인은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시 22:25)라고 노래한다. 찬송도, 말씀도, 사랑도 주께로부터 온 것만이 참되고 본 된 것이다.
3. 렉시오 디비나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거룩한 독서' 혹은 '성독(聖讀)'이라는 말로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의 핵심 영성훈련 방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듣는 훈련이요, 하나님 말씀을 체화(體化) 하는 훈련이요,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독서로 시작하지만 실제로 그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렉시오 디비나를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12세기의 수도자였던 귀고(Guigo)가 정리한 렉시오 디비나의 4단계(영적 사다리)는 이렇습니다.
1. 읽기 | Lectio
①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성경을 작게 소리 내어 천천히 읽는다. ②본문의 뜻을 이해한다. ③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으면 거기에 잠시 머물면서 작은 소리로 천천히 반복해서 암송한다. ④마음에 닿았던 성경 구절을 가지고 일상에 돌아가서 끊임없이 되뇌며 묵상한다.
2. 묵상하기 | meditatio
말씀을 반복해서 묵상함으로 그 말씀 안으로 들어간다. 성령을 의지하여 반복해서 읽다 보면 특정 구절이나 말씀의 단편 혹은 단어가 내 마음에 떠오르게 된다. 그 말씀을 붙잡는다.(마13:44, 벧후1:19)
3. 기도하기 | oratio
묵상을 통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기도로서 우리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는 단계이다. 바로 여기에서 '참회의 기도, 간구의 기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4. 관상하기 | Contemplatio
1. 예전의 기원
유월절 식사는 히브리(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해방의 날을 기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음식만을 나누어 먹는 식탁과는 분명히 구별되었습니다. 이 식탁은 엄숙하고 의미 있는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자리요, 이스라엘 신앙이 전승되는 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먼저 손을 씻고 정결례를 행한 다음에 온 가족이 유월절 식탁에 둘러앉으면 가장이 유월절 축제에 대한 감사와 축복을 선언합니다. 이 때 참석자들은 식사 중 네 번에 거쳐서 물을 탄 포도주를 마시는데 그 중 첫 잔을 마십니다. 그 다음에 유월절 음식이 들어옵니다. 이 음식은 언제나 소박했습니다. 과거 출애굽의 전통에 따라서 식탁에는 반드시 쓴 나물과 무교병이 올라오는데, 히브리어로 '마짜(matza)'라고 불리는 이 무교병은 밀가루를 발효시켜주는 누룩을 전혀 넣지 않고 만든 딱딱하고 거칠은 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딱딱한 빵을 먹으면서 그들은 출애굽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되새겼습니다. 빵이 발효되기를 기다릴 시간도 없이 발효되지 못한 반죽을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고 서둘러서 떠났다는 것을 그들은 이 무교병을 먹으면서 상기하곤 했습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의 정신적 유산인 탈무드 중에서 율법 이외의 우화로 이루어진 학가다(Haggadah)를 읽는데, 어린 자녀의 질문에 대한 어른의 대답형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자녀가 먼저 질문합니다. '오늘의 이 식사는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집안의 어른이 신6:21의 말씀으로 대답해줍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바로의 종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애굽을 내려치시고 우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리고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 출애굽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금의 역사로, 식탁에 둘러앉은 모든 가족들의 가슴속에 새겨집니다.
그 다음 애굽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을 구원하신 것을 회상하면서 할렐(Hallel)이라는 시편 찬가를 부릅니다. 그 다음 두 번 째 물탄 포도주를 마시고 이번에는 양고기가 식탁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은 떡을 떼어서 축복한 후에 가족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 바로 이 시점(時點)에서 당신의 찢기실 살과, 흘리실 피에 대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잔을 마십니다. 이 잔을 흔히 축복의 잔(고전10:16)이라고 부르고 이 잔을 마실 때 또 한 번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할렐(Hallel)'의 후반부인 시114-118편 혹은 115-118편을 부르고 네 번째 잔을 마심으로써 유월절 식사가 모두 끝나게 됩니다.
2)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가지셨던 유월절 식탁에 그 기원(起源)을 두고 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이별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감정적인 이별을 하지 않으시고 성경적인 이별을 하셨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고 끝까지 믿음을 잘 지키라고 당부도 하면서 눈물겨운 이별을 나눌 것 같은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나눔으로 이것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이 되게 하셨고, 또 그 순간이 주님의 살과 피로 나눈 최초의 성만찬이 되게 하셨고,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오게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 22:15, 16)
우리도 대개 이별할 때 식사를 합니다. 식사라는 것은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이고,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한 끼 식사라도 함께 나누고 보내야 덜 섭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만찬을 단지 함께 마음이나 사랑을 나누고 섭섭함이나 달래는 자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식탁으로부터 계승된 이 만찬을 통해 당신의 죽으심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십자가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① 그리스도의 몸 (마26:26, 막14:22, 눅22:15-16, 19)
예수님께서는 이 식탁을 나누시면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 하나를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마지막 만찬사가 세 명의 제자와 바울에 의해 동일하게 언급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만찬과 떡을 떼어주며 남기신 짧은 말씀이 세 명의 제자와 바울의 기억 속에 처음부터 각인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태와 마가가 전해주는 예루살렘 전례나 누가나 바울이 전해주는 안디옥 전례가 표현에서 약간 다릅니다. 주님의 만찬사에 대해서 마태와 마가는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26:26, 막14:22)라고 했고, 누가와 바울은 눅22:19와 고전11:24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중함은 주님의 만찬사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만찬사를 자세히 주시하고 보다 분명한 사실을 전달하고 싶어 했던 사도들의 애정 서린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주님의 몸에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주님의 몸에 그토록 주목했을까요?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몸이 그대로 우리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스도의 피 (마26:27-28, 막14:23-24, 눅22:17, 20)
예수님께서 잔을 들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붇는 것이라”(눅22:20) 하신 말씀에서 우리를 이 성찬에 초대하신 주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처음 초대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바울은 고전11:23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다.” 라고 이 초대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모든 신자들이 성찬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왜 성찬에 초대받은 자가 복됩니까? 그 이유야 이루 헤아릴 수 없겠지만, 우선 그들은 구약으로부터 전해진 언약의 계승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은 이 피에 대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막14: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 28) 여기에서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표현을 누가는 눅22:20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나 마가 그리고 누가가 한결같이 주님이 흘리신 피를 ‘언약’ 혹은 ‘새 언약’이라는 단어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시작된 구약의 배경을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이 광경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제물로 쓰인 짐승의 피를 붉은 양털과 우슬초에 적셔서 백성들에게 뿌리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이 피를 뿌리면서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 모세가 백성들에게 뿌리는 이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체결된 어떤 약속이었습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심으로 세우실 온전한 구원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마태나 마가 그리고 누가가 선언하고 있는 '언약' 혹은 '새 언약의 피'라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를 단에 뿌림으로써 체결되었던 하나님과의 옛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오늘 성찬에 초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구원의 새 약속’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구원의 새 약속입니다.
3. 초대교회의 예배
이렇게 아침 시간에 행하던 ‘말씀의 예배’와 저녁 시간에 행하던 성찬 예식 즉 아가페는 대개 3세기까지는 독립된 별개의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3세기를 전후해서 이 두 가지 예식이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즉 저녁에 행하던 아가페 예식이 아침에 바쳐지던 말씀의 예식과 결합된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아가페 예식이 저녁에 거행되었던 것은 최후의 만찬을 지낸 시간과 일치하기 위해서 였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시간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페 예식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옮겨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바로 우리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것이 이렇게 최후의 만찬이고, 이 만찬이 3세기 이후로 말씀을 받아들인 것이 변질이라면, 그나마 그 최후의 만찬을 버리고 말씀만 정착시킨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겁니다. 웨슬리는 독립 전쟁이 끝난 뒤 아메리카의 영구 교도들과는 달리 성례전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광야의 주린 양떼’들을 바라보면서 1784년 9월10일 브리스톨에서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 문서가 바로 ‘북미주 감리교도들의 주일예배식’이었는데, 그 내용은 1)공동기도서의 개정, 2)39 종교 강령의 개정, 3)새 교회를 위한 성직서품식순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해 제안되고 발티모어 연회에서 가납, 확인된 이 예전적 예배식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폴 샌더스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매우 강렬한 복음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건주의의 종파적 환경에서 양육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적 예배나 성례전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주례적인 성찬예배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자유주의적 분파의 주장에 더욱 고무되어 기도서에 의한 예배란 진실한 신앙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해롭고도 잘못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둘째, 전도자들뿐만 아니라 신도들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격조 높은 문학 양식에 익숙해 있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수준 높은 교육과 세려된 문화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으며, 들판이나 숲속 혹은 오두막집의 난로가에서 예배가 이루어졌고, 평원지대라 하더라도 기껏해야 통나무로 지은 마을회관 같은데서 예배를 드렸으니 영국의 차분하고 아름다운 예배식이 이런 환경에서 정착되기란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의 ‘주일성찬예배식’을 설명하는 서론 부분에서 “나는 영국교회의 공동기도서보다 성서적이고 이상적인 경건심을 확고하게 표현하는 예배서는 세상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라고 강조했다. 또한 “모든 감리교도들은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만 하며 주의 만찬에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며 십자가의 요의가 성찬식에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1744년 영국 교회에서 주례적 성찬식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매주 성찬식을 고집하며 ‘예전을 가진 교회’, ‘객관적 예배’의 균형을 중요시했습니다. 그가 1784년 미국에 가서 그곳 감리교도들의 너무나 간소화된 예배를 보고 나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렇게 멀리 전통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존 웨슬리 ‘감리교 주일성찬예배식’ 박효섭 옮김(카리스마타공동체) 1994 라고 한 말은 오늘의 감리교회도 음미해 볼 말입니다.
2. 현대 개신교 예배 반성
1. 성부께 대한 감사와 찬미 (눅22:17, 고전11:24)
2.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ἀναἁμν-ησις)' (눅22:19, 고전11:23-26)
3. 성령의 임재 (요6:53-63)
4. 그리스도와의 연합 (고전6:11)
4. 맺는 말 & 제언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제7조’는 이 생각을 발전 시켰으며 또한 전례헌장 실시 평의회는 1967년 발표한 ‘성체 성사의 지침 9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체 신비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해 신자는 주님 자신이 교회의 전례 행사 안에 현존하고 있는 그 방법의 주된 것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그 이름을 위하여 모인 신자의 집회 안에 늘 현존하고 있다.”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120쪽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문 신학자였던 칼 라너는 1965년 12월 12일 있었던 공의회 폐막식 강연에서 "쇄신과 개혁을 위한 하나의 시작을 내딛었을 뿐 그것은 곧 시작의 시작이었다"고 공의회를 평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쇄신과 개혁을 위한 하나의 시작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 시작은 참된 예배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교회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성만찬을 회복하는 것에서 완성된다 하겠습니다. 성공회의 주낙현 신부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계간지인 '대성당지' 부활특집호에 낸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존 웨슬리 사제는 오롯이 성공회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성공회의 개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무슨 제도적인 개혁이나 권위에의 도전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공회의 전통 안에서 '말씀과 성사'라는 기본적인 구원의 방법에 충실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말씀과 성사 앞에서 타성에 젖지 않았고 늘 정직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늘 진지하게 자신의 구원이 참된 것인가, 자신의 고백이 진실한 것인가를 말씀과 성사 앞에 드러내며 물었습니다. 이 개인적인 열심과 진지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귀한 모범이 됩니다." 웨슬리의 후예인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