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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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19:57

그늘이어도 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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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이어도 좋아라

 20150413_074430_HDR.jpg

 

신앙생활을 하는 이에게 보편적인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의식 또는 체험(이하 ‘현존’으로 함)일겝니다. 누구든지 그분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고, 늘 그런 의식(깨어있음)에서 살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을 것 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체험을 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늘이 아니라도 순간이나마 깨어있는 상태에 있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얼마나 수련을 하면 그런 체험을 할 수 있고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나님의 현존의식 속에서 살 수 있을까? 다들 이런 생각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수련방법들이 제시되고 이곳에도 기웃해보고 저곳에도 기웃해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요?

 

작년에 일주일동안 관상기도 모임이 있어 참여한 일이 있었지요. 목요일 아침에 한시간 동안 자유롭게 명상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색다른 깨달음이 제게 왔어요. 동쪽에 나있는 창문으로 햇빛이 약간 들어왔어요. 창을 타고 들어온 빛은 그만큼 바닥에 그 표시를 하더군요. 창문의 모양으로 바닥에 표시한 빛은 어둠에 있던 마루바닥을 빛과 그늘로 나누더군요. 창문 틀 만큼이 빛이었고 나머지는 그늘이었지요. 그런데 그늘 속에 있는 저는 어둡지 않았어요. 빛은 보여지는 만큼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늘에도 비추었던 것이지요. 자연스런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빛은 비춰지는 만큼만 빛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이었습니다. 빛이 비춰지지 않은 그늘에도 빛은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늘이었지만 어둡지 않았지요. 빛이 비춰지는 만큼의 환한 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둡지 않은 괞찮은 빛이었습니다.

 

그순간 깨달음이 제게 왔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이란 꼭 체험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빛이 내게 직접 비춰지지 않아도, 그늘이어도 어둡지 않고 빛의 영향 속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현존도 그러하다고 느껴지더군요. 그늘에 있어도 즉 현존을 지금 여기서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내가 지금 여기에 하나님과 함께, 그분 안에 있음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존의식 이었습니다. 빛이 직접 오지 않아도, 내가 그것을 지금 여기서 체험하지 못하여도, 그늘이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늘이어도 괞찮았습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은요.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다양한 노력을 하지요. 때로는 성취감도 들고 때로는 낙담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성취감이나 낙담과 자책은 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고 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사살이지요. 받아들이는 순간,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노력은 필요하지 않고 다만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현존의식이고 깨어있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늘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마치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처럼, 그러다가 어느 날 숨을 들이 쉬고 내 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처럼 말이지요. 숨을 들이 쉬고 내 쉬는데 아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현존도 그러하였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내가 있는 곳이 빛인지 그늘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늘이어도 좋았습니다. 내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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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21:40

거듭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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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_IMG_1475464761417.jpg

 

거듭나야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거듭남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을 볼 수 있는 것.

거듭남과 천국과 봄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거듭나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다 거듭났는가?

 

거듭남이라는 사건은 우리 신앙의 과정에 있는 세례와 믿음의 수용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일차적으로 믿음의 수용을 거듭나는 사건이라 생각했고, 세례로 그것을 상징했다. 

왜냐하면 거듭난다는 것은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의 바탕은 믿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가졌다는 교인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사들 까지,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마저도 거듭나지 못한 것 같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들을 그들이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새로운 과정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것 보다는 믿음을 받아들인 이후의 과정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천국은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으며, 그때 보여 지는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일게다.

그런데 그분의 통치하지 않는 곳이 어디이며 그분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인가?

그분의 살아있음을 믿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곳, 그곳이 하나님 나라라면 이 세상은 그 어디나 다 하늘나라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알아차리며 살아가는가?

그것은 관상적인 삶, 그분의 현존을 깨닫고 그 현존 안에 머무는 삶일 게다.

그분이 내가 있는 이곳에 지금 계심을 알아차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며, 그런 삶이 이뤄질 때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볼 수 있다!

 

거듭남은 일회적 사건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지속적인 사건인가?

과문한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만일에 영혼의 ‘어두운 밤’이 우리가 거쳐야 할 일회적인 과정이 아니라면 거듭남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게다.

거듭남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면 그 첫 번째 사건은 믿음의 수용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거듭남은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가?

물론 한번으로 마쳐지는 특별한 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커다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고 산다.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심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분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분을 잊고 또한 잃어 버렸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그분을 다시 찾아야 하고, 되새겨야 하고, 그분과 다시 이어져야 할게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심을 알아차리고, 그분이 각 사람 사이에 무언가 움직이고 계시며, 다른 어디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음을 볼 수 있을 때,  바로 이때가 거듭날 때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볼수 있으며 이미 그의 나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걸까?

우리가 갖고 있는 현재의 습관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껍데기 자아가 우리의 변화를 가로 막고 있다.

왜?

그 변화는 무엇으로의 변화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막고 있는가?

 

우리의 궁극적 변화는 본래적인 나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창조의 목적대로 존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 부터 와서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면, 우리가 가는 길도 하나님과 함께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이 되어 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가로 막았던 걸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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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13:49

(시안의신앙)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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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180709_140607778.jpg

 

장마

 

김종제

 

 

한 사나흘

바람불고 비만 내려라

햇빛 맑은 날 많았으니

아침부터 흐려 비내린다고

온누리가 어두워지겠느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구에게 다 젖고 싶은

그 한 사람이 내게는 없구나

평생 줄 사랑을ᆢ

 

 

한 사나흘

장마처럼 그대에게 내릴테니

속까지 다 젖어보자는 거다

 

 

나는 그대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그대는 나에게 인생을 주는군요어느 인도 영화의 대사 중 눈에 띄더군요. 사랑을 감히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혈액형으로 성향을 파악하는 무모한 도전처럼 세간에 떠도는 달콤한 사랑이야기가 전부 일 수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런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를리 없지만, 노래도 사랑타령으로, 드라마도 멜로 타령으로 얼룩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가닿을 수 없는 어떤 고귀한 지점에 사랑을 설정해 놓고 그저 애타게 그리워만 하는 불가촉애를 추구하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부러 모른다고 반복하는 것은 사랑을 안다는 것에 번복을 하고 싶어서 그러니 눈치를 채셨겠지요. 층도 있고 결도 있고,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그 양과 질을 달리하는 사랑을 어떻게 계량화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허나 남녀의 멜로가 아니더라도 우리 안에는 어릴 적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서 무한한 특혜를 받았던 그런 아련한 기억이 무의식에 기반이 되어 있어서 흠뻑 받았으니 흠뻑 주고 싶은 마음도 안에 메아리로 맴도는 것도 그리 상스런 일이 아닐 듯 합니다.

 

 

저는 가끔 비에 젖을 때, 과장을 보태면 어머니 뱃속 안에 양수에 감싸있는 느낌이랄까요.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있습니다. 내린 비 고스란히 맞고서 일정시간 지나면 뜨듯한 체온이 폴리에스테론과 살결 사이에서 지글지글 끓으면서 훈훈해지는 그런 순간에 어머니 뱃속에 젖어 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어머니의 그것이 으로 시작하는 것이 어쩌면 비가 는 것과 같은 말품인지 괜한 미스터리를 가져봅니다. 여하튼 사랑은 그렇게 진하고 오랜 기억을 되살리고 세상에서 가장 포근함을 부활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나이가 먹어가면서 왜 남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더 그리워지는지 청승입니다. 그 내막을 좀 살펴보면 우린 거기서 출발해서 거기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머니로 와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게 인생 한 바퀴 아닐까요.

 

 

하느님의 사랑도, 거기서 왔는데 이내 까마귀에게 기억을 내주고 깜깜했지만 다시 그분에게 젖고 싶은, 그 분의 엄숙함 뒤 켠에 놓인 숨겨진 그 소파에 좀 앉고 싶은 것이에요.

 

 

한 사나흘 이렇게 장마가 내리는 날, 더듬더듬 잊었던 사랑을 좀 찾아보고, 깨졌던 마음도 살펴보고, 땜 빵을 하던 미장을 하던 고 싶습니다. 어머니 꼭지도 다시 물고 싶고요. ‘속 까지 다 젖어 보자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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