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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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그래서 서로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다. 그것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일일까?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면 남에게 상처를 받기 이전에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상처가 될지 아닐지는 나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즉 상처를 받도록 한 그 행위에 대한 나의 해석여부에 따른 것이다. 상대방은 내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자극을 줄뿐이다. 상대는 강 자극 이건 약 자극 이건 자극을 줬을 뿐이지 상처를 주진 않았다. 즉 그 자극에 대한 나의 해석 여부에 따라 그 자극은 상처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할 뿐이다.  상대는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내가 상처를 받게끔 해석하기 이전엔 아무도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상대가 내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할 뿐이다. 순서는 상대의 자극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내안에서 일어났고 이후에 그 해석과 평가에 따른 상처가 내게 온 것이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해석을 할까? 결과적으로 스스로가 상처를 주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모르는 이유는 이것이 이래야만 행복해 진다는 거짓자아의 움직임이며 또한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 일게다. 그래서 모를 뿐이다. 

 

   어린 유아시절에 우리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한다. 이 경험은 어린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안전을 추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애정/인정을 구하고, 힘/통제를 발휘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욕구가 채워질 때 비로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욕구가 채워진다 하여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행복은 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런 잠시일 뿐 곧 사라지고 만다. 느끼더라도 잠시 일뿐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 같고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감이 다가온다.

   그리고 유치시절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이시기에 어른들의 가치관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자아 가치관이 형성되고 동일시가 이뤄진다. “우리 아버지는 힘쎄” 하면서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가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생존/안전, 애정/인정, 힘/통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동일시한 것에 공격을 당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적대감이나 두려움이 일어나고 분노, 질투, 비탄 등의 괴로운 정서가 우리를 뒤덮게 된다. 이런 내적인 프로그램이 작동하게 되면 이성적 분별이 중지되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성장해가면서도 이와같은 프로그램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음단계로 발달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어린 시절의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청소년과 어른 시절 등 각 발달단계에 맞는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컴퓨터에 들어온 바이러스가 부팅하는 순간부터 작동하는 것처럼, 이놈도 그러하다. 새로운 버젼을 깔려면 먼저 깔린 프로그램을 삭제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 프로그램이 중심에서 작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프로그램을 깔고 있으니 새 프로그램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정적 시기엔 늘 중심에 있는 프로그램이 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몸은 다 커서 어른인데 우리 내면의 세계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며칠 전 아내의 몇 마디에 기분이 상한 적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아내 탓만 했다. 마음이 불편했고 그래서 그 상처를 계속해서 봤다. 내면에 감춰진, 어린시절에 심겨진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었다. 

 

   많은 걸음을 걸은 것 같았는데 여전한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서있는 자리가 달랐다. 서있는 자리가 달라지니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내안에 숨겨진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순간 마음의 불편함이 사라졌다. 봄 햇살에 눈 녹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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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텀블벅_'방사능 오염지도 만들기'를 후원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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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umblbug.com/eyck_et

 

 

 

'기독교환경운동연대' , '한국기독교장로회청년회'와 함께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두 번의 측정을 통해 기계가 한 대 밖에 없다보니

많은 사람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측정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펀딩을 통해 얻어지는 수익으로

몇 대의 방사능량 측정 기계를 더 구입하고자 합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울진 한울원전 등을 방문하고,

지속적으로 핵발전소와 주위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방사능량을 측정하고,

오염지도를 업데이트 하여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리워드 안내>
 
1. 우비소녀 뱃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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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web.jpg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주일에 강화 남산교회와 서울 좋은만남교회가 연합하여 예배합니다.

2018년 8월 12일 오전 11시, 남산교회 예배당(인천시 강화군 화성길 35)에서 평화통일기원예배를 드린 후 점식식사를 나누고 오후 1시부터 윤여군 목사님의 해설과 더불어 강화평화전망대(인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와 강화역사관 인근 조봉암 선생 추모비를 답사하겠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 참여를 원하시는 교회와 개인을 환영합니다.

문의 : 010-8999-1969(방현섭 목사) /010-8666-4409(윤여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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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물결 2018.08.21 21:39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주일 공동기도문

     

    사랑의 하느님!

    한 하늘아래 하나의 강토에서 살고 있는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은 올해에도 광복절을 맞이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조국의 광복절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우리는 그 감격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73년간 분단된 채 갈등하면서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진실로 고백하나이다.

     

    역사의 하느님!

    우리는 2018년 오늘의 광복절을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맞이합니다. 지난 시기 우리 민족이 겪어온 분단과 전쟁, 적대와 대결의 세월이 점점 물러가고 평화와 번영의 무지개가 한라에서 백두까지 피어오름을 바라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이 땅에 평화와 통일, 번영의 새 역사가 펼쳐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평화의 하느님!

    분단과 갈등의 대명사였던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의 상봉과 회담이 진행되고 판문점선언이 채택되어 마침내 남과 북은 화해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단의 장벽과 전쟁의 불씨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공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분단의 걸림돌들과 전쟁의 온상들을 말끔히 거둬내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와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의 디딤돌이 되게 하옵소서.

     

    희망의 하느님!

    우리가 더 큰 꿈을 꾸기 원합니다. 5천년의 민족사를 자랑하던 우리 민족이 70여 년 간이나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더 이상 분열의 불행과 고통을 강요당할 수 없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간의 분수령에서 우리 민족의 삶이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도록 이끌어주옵소서. 마음과 마음을 열고 화해와 통일로 이어지는 평화와 번영의 새 역사를 이루어주옵소서.

     

    창조의 하느님!

    믿음의 눈으로 보니 분열과 대결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이 평화와 통일, 번영의 시작점으로 존재합니다. 이제 그곳에서 맺은 평화의 선언이 활짝 꽃피어 온 겨레가 그처럼 바라던 평화와 통일의 열매가 주렁지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남과 북, 해외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번영을 위해 힘써 일하도록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적극 지지해 나서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함께 작성한 기도문입니다.


2018.08.29 10:04

받아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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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여라

 

   사람사이의 갈등은 판단하는데서 나온다는 점은 지난번에 이야기한바 있다. 인간의 판단은 상대의 모자람만 보게 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 판단은 상대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갖게 하여 상대를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갈등과 대립은 증폭된다.

 

   우리는 상대가 자신을 받아들이기만 요구하지 상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댄다. (물론 이것도 판단의 결과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을까? 그것은 바다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똥이건 오줌이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다 받아들인다. 다 받아들여서 ‘바다’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모든 것을 평평하게 한다. 그래서 가장 넓다. 이런 이유로 다들 바다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 어떻게 바다는 다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것이다. 물은 흐름을 거역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바다는 가장 아래인 바닥에 있기 때문에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못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 내가 그 상대보다 위에 있다는 이야기다. 자신을 상대보다 낮은 자리에 두게 되면 상대를 저절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지위고하나 빈부의 차이도 아니며 지식의 높고 낮음과도 관계가 없다. 다만 자신의 위치를 상대보다 높게 두느냐 아니면 낮게 두느냐의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곳으로 오신 분이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기 위해서, 사람의 자리가 아닌 말의 먹이통에서 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얼마 전, 아는 친구로부터 내가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들었다. 과거에도 이런 유의 말들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속이 많이 상했고 기분도 나빴다. 상대가 마냥 괘심하게 보였다. 

 

   ‘어떻게 해야지?’, ‘그놈의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야단을 칠까’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그의 잘못을 끄집어내는 순간, 판단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내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내가 그보다 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그렇게 판단하지 말자고, 받아들이자고 이야기 하고 다녔는데 정작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나의 판단을 놓았다. 그러자 문제가 사라졌다. 문제는 상대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판단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었다. 이어서 내 위치도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가 내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절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판단하고, 늘 자신을 상대보다 높은 자리에 두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상대의 부족함만을 이야기하고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변화되어야 할 대상은 바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합리화하고 상대만을 변화시키려 한다. 

 

   참으로 불쌍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이다. 종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자유한 사람이 되라고...... “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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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흥도 2018.08.29 10:04

    한 10년 전쯤 <농촌과선교>에 실렸던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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