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top^

로그인

조회 수 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성령강림 후 제23(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읽기 | Lectio

 

구약 | 65:17-25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 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 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 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 들과 같을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 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 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 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응송 | 12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서신 | 살후 3:6-13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 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 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 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 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 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 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복음 | 21:5-19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 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 르지 말라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 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 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 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 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묵상 | meditatio

 

65:17, 18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은 궁극적으로 성도에게 무엇을 가져다줍니까?

 

21:19을 묵상하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인내할 때 성도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살후 3:12, 13을 묵상하십시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 는 어떠해야 합니까?

 

기 도 | Oratio | 5-10

묵상 나눔



새 하늘과 새 땅의 꿈

 

건축가 승효상이 수도원 순례 끝에 집필한 '묵상'이라는 책에 '아비뇽 교황청'을 방문한 후의 소회를 정리한 글이 있습니다. 아비뇽 교황청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에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제국 레오3세가 내린 성상 파괴령을 로마 교황과 그레고리오 2세가 거부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으로 결별합니다. 교황과 황제, 교권과 왕권,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 두 권력의 충돌은 표면적으로는 이단논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두 세력의 권력욕이 작동했습니다. 교권과 왕권이 아슬아슬하게 대립하던 1303,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명을 받은 군대가 로마에서 떨어진 별장에 있던 교황을 습격해 폐위시키고, 1309년 아비뇽에 교황청을 마련해 자신들이 세운 프랑스인 추기경 클레멘스 5세를 거주하게 합니다. 그런 중에 이탈리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7세가 로마를 침략하는 바람에 교황은 로마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계속 아비뇽에 체제하게 되었고, 이런 상태는 일곱 명의 교황이 바뀌는 1377년까지 지속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이 진행되면서 아비뇽은 엄청난 도시 발전을 이룹니다. 68년 동안이나 교황청의 도시였으니 그곳은 어느덧 유럽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에 걸맞게 도시와 건축물이 융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중에서 아비뇽 교황청은 높이 50미터에 연면적만 4,500평인 거대한 성채였습니다. 교황이 떠난 후 폐허가 된 그곳은 19세기에 감옥으로 사용되고, 훗날에는 군 시설로도 쓰이는 과정을 겪습니다. 아비뇽 교황청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 끝에 승효상은 이렇게 자신의 소회를 적어놓았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종교적 신심이나 영성이 발현된 곳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저 권력과 암투의 밀실로만 보여 실망을 거듭한 것이다. 옥상에는 총포를 쏠 수 있는 장치들이 있었으니, 이 건축은 사랑과 평화를 말하는 종교의 시설이라 하기에는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집이었다.

 

하나님을 빙자해 사람이 권력을 누리고, ()과 속()이 뒤엉켜버린 현장에서 느끼는 당연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역사의 뒷담화로 남아버린 교회의 흔적은 인간이 쌓아가는 아성이 얼마나 속절없고 허무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인간이 쌓은 허무하고 불완전한 아성과 비교되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완전한 세상을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장엄한 어조로 그 세상을 소개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65:17

 

이 말씀은 1차적으로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새로이 회복될 공동체에 관한 이상(理想)인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사회와 질서가 얼마나 완벽한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바벨론에서 당했던 괴로운 기억들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더 이상 고통과 슬픔이 없는 메시아 통치시대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21:1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구약과 신약이 같은 개념의 단어로 말하는 이유는 구약도 신약도 묵시문학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묵시문학은 유대인들의 고유한 세계이해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지금의 세상이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통해 온다는 사상이 묵시문학인데, 사실 이런 사상은 까닭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상이 싹트게 된 것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역사 속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정은 이사야 시대에도 있었고, 요한계시록이 쓰이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 사정이라는 게 뭘까요? 현실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이 성취될 장소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 65:18, 19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예루살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처음 하나님이 좋아하셨던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만연한 세상입니다. 몇 날 살지 못한 어린이와, 수명(壽命)을 채우지 못한 노인이 죽어나갑니다(65:20). 자기 손으로 지은 집에 자기가 살지 못하고, 제 손으로 가꾼 포도를 자기가 먹지 못합니다(65:21). 굶주림과 약탈이 다반사이고(65:22), 노동이 헛수고로 돌아갑니다(65:23). 바벨론에 끌려가 고통겪을 때 그들은 지긋지긋한 포로생활에서 벗어만 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희망과 달랐습니다. 정작 고국이라고 돌아와서 보니 엉겅퀴로 뒤덮인 땅을 기경해야 했고, 무너진 성을 세우기 위해 땀 흘려야 했고, 적대적인 시선과 도발에 맞서야 했습니다. 희망은 항상 달콤한 것이지만 현실은 쓰디쓸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죽는 자도 산 자도 모두 힘겨울 때, 흑암과 공허와 혼돈 가운데 빛을 비추셨던 창조주 하나님을 잊으면 삶은 비극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민심은 각박해지고 원망이 창궐하고, 분쟁과 갈등 속으로 휘말려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없이 몸부림을 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만들어 가는 역사는 인간의 기만 위에 세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 인간의 기만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 그것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히브리공동체가 경험한 조국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새 창조를 약속하시는 겁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65:17) 그리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삶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 65:20-23

 

사실 이런 예언은 그들이 처음 들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은 이미 2이사야가 꾸준히 예언해 온 내용입니다(45:7, 12, 18, 48:6). 특히 분사형을 사용해 하나님의 새 창조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해 왔는데, 2이사야가 태초의 창조와 새로운 창조를 연결하고 있다면, 오늘 말씀에서 제3이사야는 새로운 창조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65장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완결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이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이사야가 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희망이 그다지 마음에 울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아직 자신이 건축한 집에 살고 있지 못하고, 자신이 농사지은 농작물을 먹을 형편이 아니어도 제3이사야의 예언이 그렇게 유토피아적 낙원으로까지 손꼽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의학이 발달해서 어지간해선 잘 안 죽고, 소위 백세시대라 할 만큼 수명도 늘어났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수한 만큼 살 수 있고, 정치인이 조금만 잘 해도 자기 수고한 것만큼은 삶의 질을 높여갈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고작 이런 정도의 변화를 두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라며 마치 정치인들처럼 과장해서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런데 사람이 만들어 온 세상을 조금 냉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등은 언제나 정치적 구호를 넘어서지 못했고, 양극화된 사회에서 약자는 차별 당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현실을 보십시오. 우리나라를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온 국민이 눈을 뜨고 지켜본 참사인데, 유족들은 위패조차 갖추어놓지 못한 채 슬픔마저 억압받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이 기막히고 슬픈 참사를 겪으면서 내 애도를 표현할 대상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정작 책임져야 할 고위 관료들은 다 빠져나가고, 말단에서 고생한 사람들에게 책임지라는 나라를 평등하고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유시민 작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엔트로피'라고 한 마디로 정의했습니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혼돈과 공허입니다. 무질서가 질서를 누른 사회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역사가 얼마나 무질서하고 불의할 수 있는지를 절감합니다. 하긴 교회가 지나온 역사 속에서도 종교적 신심이나 영성이 발현된 곳을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고, 권력과 암투의 밀실로만 보여 실망을 거듭했다고 한탄하는데, 세속인들이 이끄는 사회에서 정의와 질서를 기대한다는 것이 그렇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만 허무하게 느껴져서 참담합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희망을 갖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질서와 혼돈을 양산하지만 하나님은 무질서한 세상 안에 질서를 창조하시는데, 그것을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에 우리 시선도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날 수를 못 채우고 죽는 젊은이가 있는 곳,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고독가운데 죽어가는 곳, 자기가 건축한 집에서 자기가 살지 못하고, 자기가 심은 농작물을 자기가 먹지 못하고,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과 여자들이 울부짖는 곳, 공권력의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울부짖는 곳, 그런 일들이 세상 복판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시선은 그 현장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마음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전형적인 묵시문학 방식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 65:25

 

이런 세상이 와야 더 이상 우는 소리나 부르짖는 소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런 세상은 우리 상식으로 가능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을 한 울타리 안에 넣어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둘이 함께 어울려 지낸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 상식일 뿐이지 하나님께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사야가 보고 있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상(理想)입니다. 지금의 하늘과 지금의 땅에서는 힘센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지만,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작동하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약자와 강자가 평등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런 이상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제3 이사야의 이상은 성취되었을까요? 예루살렘은 평등하고 평화로운 성이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사야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말씀선포는 무의미한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이상이 당장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느냐의 여부보다 나의 이상이 하나님의 뜻과 맞닿아 있느냐 하는 것과, 그 이상이 낙심하지 않고 내 가슴이 불타고 있느냐 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먼저 새롭게 창조 된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그 이상의 동역자로서 삶을 다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어둡고 부패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시선과 손길이 닿으면 전혀 새로운 사회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 사회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사회이며,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회입니다. 땀 흘려 노력한 만큼 거둘 수 있고, 그 열매를 즐길 수 있는 사회입니다. 정직이 사회의 덕목이 되고, 성실이 결실로 거두어지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은 정직과 성실로 살아가는 사람의 파트너이시고, 그것이 인격의 열매가 아닌 믿음의 열매일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당신의 의를 이루십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다 해도, 말씀과 성령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쉽지 않는 길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형제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내 욕망을 절제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은 비로소 무르익어갑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후 5백여 년 지난 어느 날, 예수님과 어떤 사람들이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 21:5, 6

 

기원 전 20년경에 헤롯 대왕이 건축한 헤롯 성전은 헤롯 자신이 봉헌한 금으로 세공한 커다란 포도나무와 이집트의 톨레미(Ptolemy) 대왕이 보낸 거대한 입상, 그리고 아그립바 2세가 봉헌한 금 사슬 등등 갖가지 보물로 장식된 건축물로서 어느덧 유대인들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에 있는 현관 기둥들과 회랑들은 모두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었고, 지붕과 문들은 황금색으로 치장되어 있어서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서에서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했다"는 것은, 그 화려함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포로귀환 직후 예루살렘의 현실과, 예수님과 어떤 사람들이 본 신약시대의 예루살렘의 현실은 극단적으로 서로 달랐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 예루살렘의 현실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날 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는 어린이가 있고,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고독가운데 죽어가고, 자기가 건축한 집에서 자기가 살지 못하고, 자기가 심은 농작물을 자기가 먹지 못하는 그런 세상을 이사야는 보았습니다. 반면 예수님과 어떤 사람들이 본 예루살렘 성전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금으로 세공한 화려한 포도나무와 갖가지 보물로 장식된 건축물들, 흰 대리석으로 만든 성전 기둥들과 회랑들, 황금색으로 치장된 지붕과 문들이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비참한 현실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 이상을 보게 만들어 주었고, 예수님과 어떤 사람들이 보았던 화려한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종말의 엄숙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21:6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그 이상을 부여잡고 평생을 믿음으로 산 우리의 삶만 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슴에 품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 창조의 도구로 산 삶이 남습니다. '지금', '여기'가 중요한 이유는 저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저 세상을 망치면 안 됩니다. 오늘 복음서의 결론으로 주님은 이렇게 당부합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그리고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절하게 당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요즘 우리는 인내가 필요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내만' 하면 새 창조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믿고 의롭게 살아가는 결기가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폴 틸리히는 신앙을 '존재의 용기'라고 했습니다. 새 창조된 존재로 사는 것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시선을 두고,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내로 생명을 건질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실천 | Praxio

 

사라지고 무너질 것들에 시선을 두고 있지 않은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가?

?

  1. 대림절 제3주-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

    대림절 제3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
    Date2022.12.10 Views4
    Read More
  2. 대림절 제3주 (가해) 성서일과에 따른 Lectio Divina

    대림절 제3주 (가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 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성령께서 오시도록 청합니다. 침묵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 의탁하는 ...
    Date2022.12.07 Views3
    Read More
  3. 대림절 제2주-회개, 천국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대림절 제2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11:1-10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
    Date2022.12.03 Views3
    Read More
  4. 대림절 제2주 (가해) 성서일과에 따른 Lectio Divina

    대림절 제2주 (가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 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성령께서 오시도록 청합니다. 침묵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 의탁하는 ...
    Date2022.11.27 Views3
    Read More
  5. 대림절 제1주-벗어야만 입을 수 있다

    대림절 제1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2:1-5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
    Date2022.11.26 Views4
    Read More
  6. 대림절 제1주 (가해) 성서일과에 따른 Lectio Divina

    대림절 제1주 (가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 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성령께서 오시도록 청합니다. 침묵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 의탁하는 ...
    Date2022.11.20 Views3
    Read More
  7. 성령강림 후 제24주 (추수감사절)-그리스도인다운 감사

    성령강림 후 제24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신 26:1-11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 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Date2022.11.19 Views7
    Read More
  8. 성령강림 후 제23주-새 하늘과 새 땅의 꿈

    성령강림 후 제23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65:17-25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 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
    Date2022.11.12 Views3
    Read More
  9. 성령강림 후 제23주 (다해) 성서일과에 따른 Lectio Divina

    성령강림 후 제23주 (다해) |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 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성령께서 오시도록 청합니다. 침묵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 ...
    Date2022.11.07 Views3
    Read More
  10. 성령강림 후 제22주-그리스도인다운 시선(視線)

    성령강림 후 제22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학 1:15b~2:9 15 그 때는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1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Date2022.11.05 Views8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23 Next
/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