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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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의 제3회 신학포럼이 6월 14일(월) 오후 3시, "팬데믹 시대의 목회와 신앙교육"이라는 주제로 CI(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빌딩 이제홀에서 열렸습니다. 새물결 신학위원회가 주관한 이 포럼은 코로나 방역을 위해 이제홀 현장에는 발표자를 포함하여 10여명이 참석하였고 40여명이 온라인을 통해 참여하였습니다.

이찬석 신학위원장님(협성대학교)의 사회로 시작된 포럼은 이경덕 상임대표님(경서교회)의 인사말로 이어졌고 곧바로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와 목회"라는 주제의 발표로 이어졌습니다. 김 목사님이 발표를 마치고 질문과 의견 발표의 시간을 잠시 가졌습니다.

두 번째 발표는 이은경 목사님(배재대학교)이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와 신앙교육'이라는 주제로 해주셨고 마찬가지로 발표 후 달라진 환경에서 교회의 예배나 전례가 유의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열띤 질문이 있었습니다.

모든 발표와 질문, 토론을 마친 후 박인환 전 상임대표님(화정교회) 기도함으로 포럼을 마쳤습니다.


김기석 목사님 발표(음성)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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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목회’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팬데믹시대의 목회에 대한 이야기를 제게 해달라고 말씀 주셨는데 사실은 이 주제가 제겐 암담합니다. 왜냐하면 팬데믹 시대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하고 목회자로 40여년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목회가 무엇인지 질문 속에 있는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있어서 여러 차례 초청을 거절했었지요. 핑계일수 있겠지만 정말 할 말이 없어서였는데 거듭되는 요구를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코로나19라는 시대는 그동안 우리가 살아왔던 우리의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얼마 전부터 인간의 경제활동으로 말미암아 지구가 심각한 위기 속에 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왔고, 그래서 6번째 멸종이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던 것이지요. 이게 기후변화의 위기로 심각하게 등장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기후를 언급하고 있는 매스컴의 언어가 바뀌는 과정은 아주 급한 변화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기후변화를, 나중에는 기후위기라는 말로 바뀌었고 그다음엔 기후재앙으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조금 급진적인 언론에서는 기후붕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후변화에서 기후붕괴에 이르기까지 그 시간의 간격이 너무 급하기 때문에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이 시간이 촉박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작년 초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경향신문에서 세계석학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제레미 리프킨>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1900년만 하더라도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땅은 14%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무려 77%의 땅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통계로도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오랫동안 균형을 이루고 있던 생태계가 인간에 의해 현저하게 훼손됐다는 사실을 통계로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틴 하이데거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기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자연을 닦달하기 시작했고 결국 팬데믹이라는 큰 위기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팬데믹이 다가왔을 때 전 세계는 멈춰 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 멈춰 서서 성찰했더라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는데, 성찰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 상황이 빨리 극복되어 옛 삶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조급성만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종종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일단의 사람들이 나무위에 올라가 톱질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서 있는 가지를 톱으로 썰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그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톱질하던 사람이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쿵 하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은 비로소 하던 일을 멈추고 떨어진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다들 표정이 ‘별 어리석은 녀석을 다 보았네’ 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던 일을 계속 했습니다. 자기가 딛고 있는 가지를 계속 베는 것이지요. 이게 우리 삶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여전히 경제논리가 생명논리를 압도하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회적 환경이기도 하지요. 그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사람들에게 뭔가 아름다운 삶의 길을 가르쳐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르치는 동시에 가리켜 보이는 존재로 부름 받았습니다. 과연 그 역할을 잘하고 있나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결국 성서를 붙들고 산다는 것은 현실을 뒤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의 방향에서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그 길을 열어 보이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많은 목회자들이 초월의 방향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기보다 현실에 허덕이는 사람을 위로하는데 급급해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목회자들에게 다양한 직무가 있습니다. 돌봄, 치유, 상담, 교육, 행정 등 수없이 많은 역할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역할도 충실히 수행해내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정체성속에 살다 보니 잊어버리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가 애당초 이 길로 접어든 것이 구도자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마음 중심을 향해 찾아가는 순례자로 출발했는데, 그런데 구도자로서의 목표를 잃어버린 채 목회자로서의 능숙한 사람으로 사는 것으로 내 할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이게 나를 상당히 안타깝게 만들기도 하는 일입니다.


마치, 이제 보리베기를 끝내고 모내기 시작되는 철이긴 하지만, 옛날 시골에 살 때 오뉴월이 되면 모를 심어 놓은 논에 우렁이들이 있는데 새들이 와서 우렁이를 잡아먹고 빈껍데기만 뜨거운 물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내 모습이 꼭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내 속이 다 사라져 버리고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 40년 목회를 지나온 솔직한 느낌입니다. 사실 40년을 걸어오면 모든 게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러나 내가 정답이라고 여기고 있던 것들이 삶의 복잡성과 모호함 속에서 비끌어 질 때가 많고 날이 갈수록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무모하게 말해 왔는지, 말의 부질없음에 확고하게 사로잡힌 게 오늘의 내 적나라한 모습인 것이지요. 이게 참 .. 일종의 모순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속상한 것은 그런데 있습니다. 우린 끝없이 뭔가 새로운 세상을 가리켜 보여야 하는데, 새 하늘 새 땅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러나 사람들을 확고하게 잡고 있는 것은 새 하늘 새 땅이 아니라 오늘의 삶속에서 도태되지 않는 것이 사람들에게 거의 유일한 관심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화적인 소설 ‘갈매기의 꿈을 보면 대부분의 기러기들이 하구에 모여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끼룩거리며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만이 높이 빠르게 나는 것을 추구한다고 70년대의 젊은 우리들은 가슴떨림으로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과 나 자신을 동화시키며 지내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현실은 먹을 것을 위해 하구에서 서로 날개를 치며 끼룩거리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류 담론에 길들여진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주류담론은 행복하기 위해선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하고, 성공의 사다리 윗 단으로 올라가야 행복이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정신을 견딜 내면의 힘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들어 경쟁이 심화되면서 그 속에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공정이라는 담론을 내세우며 이 시대를 분노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정담론이란 단어가 70-80년대의 젊은이들을 뜨겁게 달군 민주화의 열망과는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어떻게 보면 공정을 화두로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선택적 공정, 즉 내게 손해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마음들이 많고,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함께 공공의 영역에서 책임져야 할 일들은 별로 책임지고 싶지 않으려 하며 능력주의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마이크 샌달>의 ‘공정하다는 착각’에 보면, 오바마 시대에 많이 사용되던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you deserve‘라는 단어 인데, ‘그럴 자격이 있어’ 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하버드에 들어온 사람들은 상층부에 들어갈 자격이 있고 그만큼 노력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자격은 사실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수많은 서포트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우연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자신의 능력으로 치환하는데 사람들은 익숙해 졌고, 그걸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아니면 질투의 감정으로 바라보며 폭력적으로 응대하는 경우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위계질서가 생기기 시작했고 공정한 담론이 훼손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환경은 결국 소비사회에 논리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 가야하는데 있습니다. 소비사회는 끝없이 불만족을 만들어 내며 존속합니다. 소비사회는 빚을 권하는 사회입니다. 당장 내가 능력이 없으면서도 빚을 내어 뭔가를 누리도록 합니다. 누림 그 자체는 좋으나 그 다음 순간에 빚을 갚기 위해 허덕일 수밖에 없는 삶이고, 결국 이러한 삶이 우리를 영원한 굴레 속에 가둡니다. 그러니까, 그런 욕망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 속에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은 분노의 마음, 선망, 자학, 공격성 등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사회가 위험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복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은 끊임없이 주류담론에 대한 대안담론, 저항담론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로마 제국의 논리,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용인되는 것이 제국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용납되지 않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의 소리만 용납되는 것이 제국의 논리입니다. 제국 속에서는 결국 사람들은 일종의 제국을 지탱하기 위한 부품으로 인정되는 것이 제국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이야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선언적으로 말함으로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제국의 논리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성경은 구성되었다는 것이지요. 출애굽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피라밋 세계의 제일 아랫단에 있는 사람들이 꿈틀 거리자 제국이 흔들렸다는 것이 10개 재앙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 살 수 있는 새로운 땅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고, 그 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형상화 되어 나타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이야기도 똑같습니다. 폭력에 근거해서 세상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팍스 로마나’, 이 허구의 평화 속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팍스 크리스티’를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섬겨야 하는 가치전복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인 것이지요. 우리가 정말 성경을 가지고 산다면 오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주류담론을 해체하고 뭔가 새로운 담론의 지평선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오늘 한국교회는 대안담론의 구실을 하기보다 주류담론의 하위 주체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권의식, 보편적 평등,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같은....


<칼 야스퍼스>가 주전 8세기부터 주전 2세기 까지를 ‘축의 시대’라고 말하면서 그 축의 시대의 핵심원리가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 이런 것들인데, 이미 그 축의 시대에 형성되었던 가치관을 오늘 우리가 계승하고 있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이게 팬데믹 시대만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암담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수도원적 영성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민입니다. 꽤 오래전 버몬트 주의 작은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 며칠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브라더들이 12명밖에 안 되는 수도원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수도원에서 자기들의 수도원 살이 목표를 다섯 가지로 정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쑥 들어왔습니다.


첫째, 고립의 대안으로 사랑의 공동체 만들기

둘째, 무의미에 저항하여 기도와 깊은 성찰의 사람 되기

셋째, 편견과 분열에 대한 대안으로 서로에게 환대를 제공하기

넷째, 인간적인 동시에 존엄한 노동하기

다섯째, 세계 치유를 위해 팔복의 징표로 살아가기


첫째, 고립의 대안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


결국 돈이 주인노릇 하는 세상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단자화 시키고 내 책임라고 말하고 그렇게 사람들을 고립시킵니다. 욕망이란 것은 배타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나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타자를 위한 여지를 갖기 어렵습니다. 욕망에 바탕을 둔 이 세상은 끝없이 우리를 고립 시킵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 공동체가 생각한 것은, 세상이 이렇게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단절시켜 점점 내가 연결되었다는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드는 시대에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과제처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는 낮선 사람들이지만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인 것처럼 대해줍니다. 내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냥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나를 맞아줍니다. 종교체험의 본질이 귀속의 체험, 그러니까 초월적인 하나님께 내가 귀속된다는 느낌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 귀속의 느낌을 통해서 내가 누군가와 튼튼하게 연결된다고 느낀다면 그런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가 우리의 과제 중에 하나입니다.


일전에 저희 교인 중에 사회복지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으로부터 노숙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들이 노숙자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갖게 되는 까닭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회적인 연결망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이 노숙생활 하기 전에는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크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하나 둘 나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하여 사회적 관계성(페르소나)이 다 끊어지고 자신의 존엄성을 세울 수 있는 여지들이 없어지는 것이 노숙인들이 길거리에서 자고, 술먹고 싸우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회복지의 핵심이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연결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교회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립에 대한 대안으로 사랑의 공동체 만들기 말입니다. 


둘째, 무의미에 저항하여 기도와 깊은 성찰의 사람이 되기


우리 시대가 우리에게 만들어 내는 것에 무의미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허무함을 느낍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보람으로 내게 귀결되면 참 좋겠지만 내가 하는 일이 참 허망하게 느껴지게 되는데, 그 무의미성에 내가 저항할 수 있겠는지, 내 삶이 의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심어줄 수 있겠는지, 인간이 인간되는 것이 자율적으로 형성되기보다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보람이라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때 보람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까 이야기 했던 단절된 주체들은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 그 기회들을 별로 얻지 못하게 되는데, 그러한 연결이 만들어 짐을 통해서 누군가와 연결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할 수 있는 주체가 됨으로써 무의미성에 저항하게 되고, 바로 그 저항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기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셋째, 편견과 분열에 대한 대안으로 서로에게 환대를 제공하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류학자 <김현경 선생>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보면 환대라는 것은 ‘누군가가 나의 삶의 공간속으로 들어와 인간으로서 역할 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고 그가 내 속에서 고향을 느끼게 해 주는 것,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환대라고 한다면 우린 이런 환대로부터 너무 멀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사람들을 무제약적으로 환대하기보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편견을 조장하고, 자꾸 차별의식을 심화 시키는 일이 개신교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차별과 분열의식을 심어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장벽철폐자라고 할 수 있다. 대만 출신의 미국 신학자 <C S 송>은 그의 책에서 예수운동을 한마디로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이 예수‘라고 소개했습니다. 예수시대는 끊임없이 장벽을 만드는 사회였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에, 의인과 죄인 사이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장벽을 만들고 장벽 한쪽의 사람들을 ’우리‘라고 하고 장벽 저 편에 있는 사람들을 ’그들‘이라고 하며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 논리로 자기 정체성을 삼았습니다. 그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거룩함의 증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장벽을 높이면 높일수록 서로를 응시할 수 있는 시선이 차단되고, 그나마 내가 눈으로 보고 있을 때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장벽이 높아지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헤치기 위해 온갖 나쁜 일을 꾸미고 있을 것만 같고 상상 속에서 적대감이 심화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로 하여금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서로가 내 곁에 다가오도록 허용하고, 함께 살며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게 행복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또 그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게 환대공동체로의 교회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인간적인 동시에 존엄한 노동하기


수도원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기도하고 노동하는 것입니다. 노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깨워 주는 것인데, 오늘 현대인들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노동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섯째, 세계 치유를 위해 팔복의 징표로 살아가기


‘팔복의 징표’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징표적 삶이라는 것이 무엇일지 머리에 그려지지 않지만 어떤 사람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게 무엇인지 알겠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그 말이 선뜻 들어오지 않지만 어떤 사람이나 공동체를 보니 온유한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더라는 것이 팔복의 징표로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 그 수도원의 이상이었습니다. 나는 오늘의 교회가 이 수도원적인 이상을 우리 속에 받아들이고 우리의 지향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전환의 시기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코비드19시대는 우리가 추구해 왔던 문명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닦달함으로 인간의 필요한 것을 얻어낸 것을 인간은 ‘개발’이니 ‘발전’이니 말해왔지만, 사실 그것은 발전처럼 보였으나 지구를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었고, 아까 이야기 한 대로 자기가 딛고 있는 가지를 톱질하는 우를 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를 끝없는 불만족으로 밀어내는 시대에 자본주의 시대가 우리에게 빼앗아갈 수 있는 능력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행복을 구성하는 방식은 하나 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이 ‘공감의 시대’라는 책에서 만들어 낸 하나의 공식이 있습니다. H=C/D 입니다. 행복(Happiness)은 자본(Capital)을 욕망(Desire)으로 나눈 것입니다. 나의 욕망을 뒷받침해 주는 자원, 즉 연봉이 많아야 하고 연줄이 많아야 하는 등 자본이 많아야 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는 끝없이 C의 어마운트가 커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돈이 많아야하고 좋은 차에, 좋은 집에 살아야 한다고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30~40년 전에 비해 우리의 경제력은 한없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정말 행복감도 높아져 갔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어마어마합니다. 우리가 반성해야 될 부분이 많다고 여기긴 하지만 우리 꼰대세대도 억울한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누릴 거 다 누리며 살고 있는데, 부모세대보다 더 잘살 수 없다는 것에 분노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뭔가 속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D라는 분모가 커질수록 분자인 C가 늘어나도 행복감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이게 자본주의 세상의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불만 속에 살게 되는 이 허구의 신화를 깰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에게 품위 있게 살려면 이런 것을 누려야 한다고 할 때, ‘그것 누리지 않아도 괜찮아’ 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내면에 있어야 겠습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대로, 저 포도는 시어서 못 먹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H=C/D라고 이야기 할 때 C가 커져야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끝없이 해서 우리를 성과사회 속에 몰아넣어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고 있다면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D를 좀 더 줄이고 ‘이제 이만하면 됐어’ 라고 말하면 좀 다른 행복이 우리에게 오지 않을까요?


결국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속에 생겨나야 합니다. 즉 시인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풀꽃 하나를 바라보면서 ‘너 참 아름답다’ 말 할 수 있고, 그 아름답다고 발화하는 순간 내 속에 있는 불만의 그림자들이 조금씩 스러져 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누군가와 더불어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점점 욕망에 갇힌 채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꾸만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샤르뎅>의 언어로 말하자면. 지금은 탄젠트 에너지가 극대화 되는 시대이다. 다시 말하면 엔트로피가 증대된 사회이고, 자체모순으로 붕괴를 앞두고 있는 사회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방사에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그쪽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용기가 우리에게 있겠는지, 그럴 내면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겠는지 스스로 반성해야 겠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불교가 말하는 삼도, 즉,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를 사회화하고 제도화 하여 사람들이 탐욕부리도록 만들고, 누가 내 몫을 차지하려 하면 성내도록 만들고 자기 삶을 성찰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어리석음의 굴레 속에 갇히게 만듭니다. 이게 탄젠트 에너지가 극대화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인데, 이 때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뛰쳐나갈 수 있겠는가. 사실 신앙의 길이라는 것이 끝없이 그렇게 방사에너지 쪽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그런 용기가 있겠는가.


자 그러면 우리의 변화가 나타나야겠습니다. 이전에는 에고ego를 중심으로 하는 삶이었다면 이젠 에코eco, 즉 생태적 삶으로 전환해야 하고, 이제는 탐욕greed에서 녹색green으로, 적대감ostility에서 환대hospitality의 정신으로, 개인적 삶solitary에서 연대적 삶solidarity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바울이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는데, 교회가 그리스도 꿈이어야 할 텐데 그리스도의 악몽이 되어버린 것 같은 게 오늘의 시대입니다. 팬데믹 시대의 목회가 무엇일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비교적 명한 한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두서없는 말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언택트 시대의 예배와 신앙교육

- 비대면을 넘어 다면 (multi-faceted) 교육으로


기독교교육정보, 제66집, pp.   295-322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정보학회, 2020. 09.


이 은 경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jjiggu1990@naver.com



I . 들어가는 글

II. 언택트 시대의 도래

III. 언택트 시대 신앙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 비대면을 넘어 다면으로

IV. 언택트 시대 예배의 교육적 의미 

V. 나가는 말



■ “세계는 코로나 이후 (AC, After Corona)와 이전 (BC, Before Corona)으로 나뉠 것”이라던 토머스 프리드먼의 예측은 이제 더 이상 예측이 아니라 기정사실이 되었다. ‘After Corona’ 외에도 BC 와 AD에 따라, 지금 시대를 Anno Disease (질병의 시대),Anno Depressions(우울증의 시대)라고 하거나 집, 가족, 나라를 뜻하는 라틴어 domus 활용해서 Anno Domi, 즉 ‘자가 격리, 국경 봉쇄, 국가 방역의 시대’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오늘날 시대를 무어라 정의하든 코로나 19가 일시적, 예외적이었던 상황을 ‘새로운 일상’, 즉 뉴노멀(new-normal)로 만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일상이 바뀌면서, 우리도 욕망도 바뀌고 있고, 이 바뀐 욕망이 다시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비대면과 단절이 ‘뉴노멀’이 된 우리의 일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언택트 (Untact)’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와 신앙교육의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한국기독교는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예배당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고, 모든 예배를 비대면으로 하는 온라인 예배라는 초유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언택트 시대에 다시 한 번 예배란 무엇이며, 신앙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논문에서는 먼저 코로나 19로 방아쇠가 당겨진 언택트 시대의 간략한 특징들을 알아보고, 이것이 어떻게 우리의 관계와 접촉방식을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언택트 시대 신앙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비대면이 아닌 ‘다면’ (multi-faceted)을 제안하면서, 예배와 성만찬이 어떻게 다면화 되었는지 알아보았다. 또한 코로나 19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삼아, 가정 예배와 가족식탁에서의 신앙교육을 회복하고, 슬기로운 집콕예배를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언택트 시대 예배가 지닌 교육적 의미를 ‘슬로 처치’ 와 ‘슬로 에듀케이션’ 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I.  들어가는 글


코로나 19(COVID-19)라는 전대미문의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한지 거의 반년이 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잠잠해질 기미도 없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최근 증가하고 있는 수도권 지역 확진자들로 인해 제2차 대유행이 시작 되는 것이 아니냐며 다시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이로 인해 또다시 모든 종교시설의 대면예배가 중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는 코로나 이후 (AC, After Corona)와 이전(BC, Before Corona)으로 나뉠 것” 이라던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예측은 이제 더 이상 예측이 아니라, 기정사실이 되었다. ‘After Corona’ 외에도  BC와 AD에 따라, 지금 시대를 Anno Disease(질병의 시대), Anno Depressionis(우울증의 시대)라고 하거나, 집, 가족, 나라를 뜻하는 라틴어 domus 활용해서 Anno Domi, 즉 ‘자가 격리, 국경 봉쇄, 국가 방역의 시대’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황용식, 2020, p. 6).


오늘날 시대를 무어라 정의하든 코로나19가 일시적, 예외적이었던 상황을 ‘새로운 일상', 즉 뉴노멀(new-normal)로 만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뉴노멀’ (new-normal)은 원래 경제학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기준이나 표준을 의미한다. 특히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시점에 등장하는 개념이다(최재천 외, 2020, p. 36). 코로나로 인해 일상이 바뀌면서 우리도 욕망도 바뀌고 있고, 이 바뀐 욕망이 다시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다(김용섭,2020; 한국경제신문사 코로나 특별취재팀, 2020). 이렇게 비대면과 단절이 ‘뉴노멀’ 이 된 우리의 일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언택트(Untact)’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와 신앙교육의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는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예배당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고, 모든 예배를 비대면으로 하는 온라인예배라는 초유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언택트 시대에 다시 한 번 예배란 무엇이며, 신앙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논문에서는 먼저 코로나 19 로 방아쇠가 당겨진 언택트 시대의 간략한 특징들을 알아보면서 이것이 어떻게 우 리의 관계와 접촉 방식을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언택트 시대 신앙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비대면이 아닌 ‘다면’(multi-faceted)을 제안하면서, 예배와 성만찬이 어떻게 다면화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 다. 또한 코로나19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삼아, 가정예배와 가족식탁에서의 신앙교육을 회복하고 ,슬기로운 집콕예배를 위한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언택트시대 예배가 지닌 교육적 의미를 ‘슬로 처치' 와 ‘슬로 에듀케이션’ 의 관점에서 논해보고자 한다. 


II.    언택트 시대의 도래


1. 코로나 19 - 언택트 시대의 티핑포인트 (tipping point)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원인불명 폐렴’이 순식간에 중국을 넘어 태국, 일본, 한국 등으로 번지면서 비슷한 증상의 폐렴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후 2월 11일에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이 질병을 ‘Novel Coronavirus로 통일하고, 줄여서 ‘COVID-19’으로 명명했다. ‘COVID-19’이라는 명칭은 코로나(Corona) + 바이러스(Virus) + 질환(Disease) + 발병시기 (2019)가 합쳐진 것으로, 2월 12일 WHO에 의해 결정되면서 국제적인 공식명칭이 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 로 불리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감염자들이 나오자 세계보건기구는 결국 3월 11일에 ‘팬데믹’(pandemic)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48년에 WHO가 발족한 이후 1968년의 홍콩 독감, 2009년의 신종 인플루엔자에 이어 코로나19는 세 번째 팬데믹이다.


팬데믹 판정을 받은 코로나19가 언택트 시대가 도래하는 데 결정적인 티핑포인트(tipping point)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택트 트렌드가 순식간에 전 사회에 퍼지는 놀라운 방아쇠(trigger) 역할을 했다. ‘언택트(untact)’는 언컨택트(uncontact)의 줄임말로,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비대면 방식을 선호하는 사회적, 경제적 현상” 을 지칭하는 말이다(에피,2020, p. 167).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은 미국 북동부 해안지방에 사는 중산층의 건강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관찰과 비대면 인터뷰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친밀도에 따라 공유하는 공간적 거리, 언어, 태도 등에서 차이가 나타나며, 거리에 따라서 사람들이 4가지 유형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4가지 유형에는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그리고 공적 거리가 있다(Hall, 1990, pp. 116-123).


그림 1.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김용섭, 2020, p. 75)


첫 번째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는 0〜45cm 이내의 거리로, 연인과 가족 사이에서 서로 사랑하고, 몸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위로하고 보호하는 거리이다. 

두 번째 ‘개인적 거리’ (Personal Distance)는 46〜120cm 사이의 거리로, 친밀한 친구나 지인이 이 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 거리는 한 사람이 손을 뻗어서는 닿을 수 없지만, 두 사람이 서로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로, 신체를 통한 관계가 가능한 거리이다.

세 번째 ‘사회적 거리’ (Social Distance)는 1.2〜2.2m 사이의 거리로, 공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거리이다. 이 거리에서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나 열기를 감지할 수 없다. 또한 한 대화중에 특히 신체적 접촉 없이 ‘시각적 접촉'(visual contact)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서로 간에 자신을 보호하거나 가려내는 데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 거리는 무례해 보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계속해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최근 코로나19의 감염 방지와 확산을 막기 위해 실시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도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적 거리’(Public Distance)는 3.6m 이상 거리에 해당하며, 상호연결을 가지는 관계는 아니다. 그래서 이 거리에서는 단어, 어휘, 문법 사용에서도 다른 거리와는 차이가 발생하고, 공적 행사에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거리다.


그동안 우리는 이렇게 친밀하고, 개인적이고, 사회적이고 그리고 공적인 관계에 따라 각각의 공간적 거리를 설정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이것이 허물어지고 있으며, 사회적 거리두기나 관계 단절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언택트 기술을 활용한 비대면 활동이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에 속하는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적 관계의 영역에서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는 ‘코로나 블루(corona blue)’ 와 같은 광범위한 정신적 고통과 정신질환의 증가를 가져오고 있다(Pfefferbaum & North, 2020, p. 510).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화 하자, 많은 이들이 단절과 소통의 부재로 인해 우울감을 호소하기 시작했으며, 이 현상을 우울감이라는 뜻의 ‘blues’에 ‘corona’를 합쳐서 ‘corona blue’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 블루’ 혹은 ‘코로나 우울’ 이 통용되고 있다(윤은경,2020, p. 273). 2020년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 18세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한 우울증 발생 비율이 48.3%, 불안이 22.6%, 그리고 우울증과 불안이 함께 일어난 경우도 19.4%에 이르고 있다<Gao et. al” 2020). 뿐만 아니라 재채기나 잔기침에도 ‘혹시 코로나가 아닐까’ 걱정하게 되는 상황을 나타내는 ‘상상 코로나’ ‘어 코로나’에서 ‘코로나 비만’ ‘확〜찐자’ ‘살천지’ ‘설거지옥’까지 최근 유행하는 신조어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비대면 활동만으로는 관계 단절과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우울감, 무력감, 소외감 등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다.


이처럼 그동안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트렌드 분석가인 김용섭(2020, p. 99)은 한편으로는 당연했던 것 중에서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택트가 일상이 된 뉴노멀을 이어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일상이었던 것 중에 문제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 모든 이들이 가장 먼저 예배와 교회학교를 떠올릴 것이다. 특히 매주 정기적으로 모든 교우가 모여서 드리는 주일예배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모이는 교회학교는 문제가 될 소지가 가장 많다.


코로나19 발병 초기에 유독 이탈리아, 이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한 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염병 확산에 ‘종교’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는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이고, 이란은 ‘이슬람’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신천지’가 그 중심에 있었다. 신자들에게 복음과 구원을 전파해야 할 종교시설, 즉 성당, 이슬람사원, 예배당이 오히려 전염병 확산의 진원지가 된 것이다. 밀폐된 종교시설에서 행해지는 찬양과 통성기도, 공동예배, 그리고 이어지는 공동식사가 비말감염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전염병 확산 초기 가장 먼저 행해진 조치는 종교시설 폐쇄와 집회, 모임, 공동식사 금지였다.


2. 단절이 아닌 접촉의 방식 바꾸기


코로나 19 로 더욱 앞당겨진 언택트 트렌드는 유통과 소비 영역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확산되고 있었고, 최근 들어 소셜네트워크의 확산이 자연스럽게 언택트로 연결되었다. 그렇지만, 언택트 기술이나 언택트 서비스가 무조건적인 단절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택트 기술의 목적은 “피하고 줄여도 아무 지장이 없도록 만드는 것” 이기 때문이다.


기술적 진화의 목적은 위험 회피와 안전 지향과도 연관이 있다. 기술이 위험으로부터 우릴 보호해 주고, 이를 통해 우리의 자유를 더 확대시켜 준다. 결국 언컨택트는 우리가 가진 활동성을 더 확장시켜 주고, 우리의 자유를 더 보장하기 위한 진화 화두다. 비대 면의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욕망의 문제다. (김용섭, 2020, p. 87)


언택트 시대의 도래는 결국 기술을 통해 우리의 욕망, 즉 단절을 통해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언택트는 “접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접촉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며,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초연결(hyper-connected) 시대에 더 많은 연결을 위한 새로운 진화 코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사회 안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단절과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언택트 트렌드는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비인간적이고, 낯선 환경이다. 그러나 미래 세대에게는 이것이 점점 더 일상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고, 그러다 결국에는 이러한 형태의 생활조건이 ‘일상’이 되는 순간, 이것은 사회 시스템의 위기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정신과 몸에도 위기가 닥칠 것이다. 우리의 몸과 정신과 사회는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공생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공동체 중에서도 특히 교회는 그 처음 시작부터 모이기를 힘쓰는 집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종교집단과 그들의 공동체가 전염병 확산의 진원지로 인식되고, ‘슈퍼전파자'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집단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모이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가 가진 힘은 연결, 접촉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eligion은 라틴어 religare에서 나왔는데, 이 말의 뜻이 바로 ‘다시 연결하다’ 이다(백소영,2020, p. 152). 그리고 그 연결의 힘이 이제껏 교회를 지탱해왔다. 그래서 스위스 출신의 기독교 상담학자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는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고, 함께 모일 때만 그 존재 의미가 있는 모임이다.


사회학자인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 2009)은 Outliers : The Story of Success 에서 무엇이 사람을 성공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족과 일에 대한 중요한 함의를 지닌 사회문화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글래드웰은 사람들을 관찰하듯이‘ 그냥 보는’(look at)것이 아니라, ‘둘러보면서 돌보는’(look around)것이 성공에 대한 훨씬 더 나은 통찰을 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탈리아 로제토 지역에서 주민들이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수시로 모여서 잡담하고 함께 식사하는 공동체 문화, 즉 ‘확장된 가족 구조’였다고 말한다. 로제토 지역 사례는 확장된 가족 구조와 소셜네트워크의 이점이 우리 삶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지를 고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 뉴욕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인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inenberg, 2018)도 Palaces for the People: How social infrastructure can help fight inequality, polarization, and the decline of civic life에서 힘든 재난 가운데서도 이를 잘 이겨내는 지역의 비밀은 ‘사회적 인프라’(social infrastructure)라고 말하면서, 사회적 자본과 사회적 인프라를 구분한다. 사회적 자본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대인관계 네트워크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 이고, 사회적 인프라는 “사람들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물리적 장소와 조직” 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자본이 발전하려면 사회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사회적 자본이 발달할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이 튼튼할수록 사회적 자본인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데 유리하고, 서로 확인하고 도우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튼튼한 사회적 인프라는 친구들이나 이웃들끼리 만나고 서로 지지하며 협력하기를 촉진하는 반면, 낙후한 사회적 인프라는 사회 활동을 저해하고 가족이나 개개인이 자기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든다. 사회적 인프라의 역할은 가히 결정적이라 할 만큼 중요하다. 학교나 놀이터 혹은 동네 식당 등에서 벌어지는, 서로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이루어지는 지역적 교류가 곧 그들의 공공 생활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건전한 사회적 인프라를 갖춘 장소에서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공동체 형성을 목적으로 이 같은 장소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꾸준하게 반복해서 모여들 때, 특히 즐거운 일을 하며 교류할 때 관계 또한 필연적으로 싹트기 때문이다. (Klinenberg, 2018, p. 5)


글래드웰이 말하는 ‘확장된 가족 구조’나 클라이넨버그가 말하는 ‘사회적 인프라’는 그동안 교회 공동체가 수행해 왔던 역할이고,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무조건 모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언택트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여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새로운 관계와 공간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언택트 시대 우리의 신앙교육은 비대면이 아니라,‘다면’ (multi-faceted)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III.    언택트 시대 신앙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 비대면을 넘어 다면으로


코로나 19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영역은 ‘교육’ 이라고 할 수 있다. 감염병 위기단계가 ‘경계(Orange)’ 에서 ‘심각’ (Red)’단계로 상향되면서, 유초등학교를 비롯하여 특수학교 및 각종 학교의 개학이 3차례나 연기되다가, 4월 9일에서야 고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3학년이 먼저 사상 처음으로 온라인 개학을 했고, 5월 20일부터 고3 학생들의 등교 수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순차적으로 학년별 등교 수업이 진행되었지만, 온라인 수업은 1학기 내내 계속되었다. 물론 대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국 대부분 대학에서 개학을 연기했고, 2020년도 1학기 내내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학교도 다르지 않았다. 3월 이후 교회의 문이 닫히고, 온라인 비대면 예배가 시작되면서, 교회학교도 문을 닫았다.  당혹스러운 몇 주간이 지난 후, 대부분 교회학교가 하나둘씩 온라인 예배와 비대면 신앙교육을 시작했지만, 그동안 예배와 신앙교육의 장으로서 교회가 누려온 독점적 지위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와 같이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전세계적 전염병과 재난은 언제고 다시 우리의 일상을 위협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시대는 코로나 이후가 아니라,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즉 ‘코로나와 함께 가야 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도 예배와 신앙교육의 뉴노멀을 준비해야 한다.


이미 몇몇 교회들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예배와 신앙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온라인예배와 온라인 신앙교육으로 인해 함께 모여 교제하고,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소통하는 과정이 부재하거나 소홀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도시와 시골 교회 간에,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 간에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언컨택트로 인한 소외와 차별이 생겨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못한 노년층, 디지털 기기를 소유하지 못한 취약계층 사이에서는 이미 ‘언컨택트 디바이드’(uncontact divide)가 문제로 떠올랐다. ‘언택트 디바이드’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은 언택트 기술이 늘어나면서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불편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디지털 기기에 대한 불편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연습과 배려도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며, 본 논문에서는 언택트 시대에 실현 가능한 새로운 신앙교육의 몇 가지 가능성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온라인 예배와 온라인 성만찬이고 , 두 번째는 가정예배와 ‘가족식탁’ 에서의 신앙교육 회복에 대해 다시 한 번 톺아보고자 한다.


1. 예배의 다면화 - 온라인 성만찬과 드라이브 스루 


대면예배, 대면 모임이 금지되면서 오늘날 많은 교회가 비대면 예배, 비대면 신앙교육을 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실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교육학적으로 볼 때, 비대면 예배, 비대면 교육의 가장 큰 단점은, 이것이 상호 소통이 일어날 수 없는 일방적 구조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끊임없는 성찰과 고백을 가능케 하는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예배가 일어나는 공간,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 상징물 그리고 현장의 분위기 등에서부터 신앙교육은 시작되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현장 예배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특히 세례, 성만찬, 결혼예식, 장례예식 등의 특수예배와 부활절, 성령강림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의 절기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왔다.


그런데 최근(2020년 8월) 코로나19의 2차 대유행으로 인해 다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드리는 예배가 금지되고, 비대면 예배로 바뀌었다. 히로나카 나오유키(2016)는 『중독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서, 중독을 유발하는 사회적 원인의 하나로 공동체에 바탕을 둔 축제의 공간을 잃어버리고, 일상에서 그 ‘유사품’을 찾게 된 것을 꼽는다. 그의 말처럼, 공동체에 바탕을 둔 축제의 공간, 즉 예배를 올바로 드리지 못할 경우, 자칫 온라인예배는 예배의 유사품으로 전락하고, 우리는 예배 중독에 빠져 허울뿐인 그리스도인으로 타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대면’ 의 반대말은 ‘비대면’ 이 아니라, ‘다면’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만남과 접촉의 형태를 다양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동안 예배와 신앙교육이 한 공간에서 얼굴과 얼굴 을 맞대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이것을 다양화하자는 것이 고, 이것은 언택트 기술들을 활용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미 몇몇 교회들은 언택트 기술을 활용하여 다면화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학교 운동장이나 넓은 주차장에 모여 ‘드라이브인 워십’(drive in worship, 차에서 내리지 않고 드리는 예배)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등장했다. 참석한 교인들은 자신의 차 안에서 라디오 주파수에 맞춰 예배방송을 듣는 것으로 예배는 진행되었다. 옆 차량의 교우들과는 차 안에서 눈인사를 나누고, 손뼉을 치는 대신 자동차 와이퍼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설교에 대한 화답은 경적으로 대신했다(노컷뉴스,2020. 4.12.). 또 서울의 모 교회는 코로나19의 위기감 때문에 오프라인 예배가 불편한 이들을 배려해 기존 교회와는 별도로 온라인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언택트 사회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최근 신학적으로 논쟁이 되었던 것 중 하나는 온라인 성만찬이었다. 성만찬 예식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행위가 비말과 접촉을 통한 감염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대부분 교회에서는 성만찬을 중단한 상태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더 이상은 성만찬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교회들에서 온라인 성만찬을 시작하거나, 약식으로 애찬식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성만찬을 실시하는 교회들에서는 목회자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축사하고 떼어내는 것을 온라인으로 보면서, 평신도들이 각자 집에서 떡과 포도주를 직접 떼어 마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을 두고 신학적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온라인 성만찬과 관련된 논의는 미국연합감리교회(UMC)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미감리회 안에서도 온라인 성만찬을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온라인 성만찬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우리 각자가 작은 공간에 격리되어 친교할 수 없는 지금이 예수님의 은혜가 그 어느 때 보다 더 필요한 때다”라고 말하고,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사람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성만찬 금식)시간은 매우 성스러우면서도 엄숙한 순간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19가 확산된 서부지역 연회 감독들은 지난 3월에 자택대피령이 해제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온라인 성만찬을 허용한다는 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한에서는 “우리는 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기에 모든 교회가 성만찬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성찰과 기도를 통해 이 시기에 (온라인) 성만찬을 나눔으로써 회중이 강건함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는 목사들의 입장을 지지한다”라고 밝혔다(Hodges, United Methodist News, 2020.5.4.).


감리교신학대학의 예배학 교수인 박해정도 지난 4월 부활주일을 맞아 온라인 성만찬을 찬성하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하지만, 2004년 총회 (General Conference)를 통해서 UMC는 ‘온라인 성찬은 공동체가 함께 할 수 없고, 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부 재하기에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결론을 내렸다. 온라인 성찬에 대한 대안으로 애찬식(Love Feast)을 제시하고 있다. (중략) 온라인 성찬이 가지고 있는 많은 제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웨슬리의 성찬에 대한 신학적 입장에 견주어 볼 때, 성찬을 수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제한적 상황에서 성찬을 더욱 장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박해정, 페이스북, 2020.4.7)


박해정은 계속해서 성찬은 은총의 수단이므로,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거룩한 신비의 식탁이 우리 앞에 있기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 을 구원의 자리로 초대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존 웨슬리의 ‘지속적인 성찬의 의무’(The Duty of Constant Communion)를 온라인 성만찬의 신학적 근거로 제시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일괄적으로 떡과 포도주를 준비하여 목회자들이 직접 분병과 분잔을 한 후, 주일 전에 각 교인의 가정을 직접 방문해서 떡과 포도주가 담긴 성찬기를 배분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찬기와 함께 교인들에게 발송한 안내문에서 “온라인예배로 함께 하는 성찬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성령의 인도함으로 참여하고, 반드시 예배 순서에 따라 집례자의 집례에 따라 성찬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연합이 영적으로 임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성만찬에 임하는 마음 자세와 준수사항을 당부하기도 했다(기독공보,2020. 4.13).


서울의 모 순복음교회에서는 온라인 성만찬에 ‘드라이브 스루’ (drive through) 방식을 도입했다. 토요일 오후에 교회 주차장에서 교인들이 드라이브 스루를 통해 성만찬 키트를 받고, 다음 날인 주일에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성만찬 예배를 드렸다(http://jesusonly.co.kr/).


온라인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19라는 위기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 사용되다가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다시 현장 대면 예배로 돌아가면 사라질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아직 드라이브인 워십, 드라이브 스루 등을 통한 온라인 성만찬은 낯설고, 불편한 경험이다. 그러나 온라인예배와 마찬가지로 온라인 성만찬은 그동안 신체적, 지리적 여건으로 예배와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었던 고령자, 환자, 장애인 등을 성만찬의 자리로 초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각 가정에서 성만찬에 사용할 떡과 포도주를 준비하는 행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식탁으로의 초대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거부보다는 언택트 시대에 교회 공동체의 연합과 예배를 위한 다양한 접촉의 방식들을 언택트 기술을 활용하여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슬기로운 집콕예배

- 가정예배와 ‘가족식탁’ 에서의 신앙교육 회복 


등교와 출근이 온라인 개학과 재택근무로 바뀌고, 교회에서도 비대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가정에서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온라인예배’가 뉴노멀이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떠밀리듯 시작하기는 했지만, 온라인예배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가정예배를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가져왔다. ‘슬기로운 집콕예배’가 필요해진 것이다.


신앙교육의 영역에서 가정예배는 이미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서혜란(2018, p. 142)은 창세기 2장 24절의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에 근거하여, 가정을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완성”이요, “거룩한 공동체”로 정의한다. 오성주(2004)도 “최초의 종교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되었으며,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은 가정이다”라고 하면서 신앙교육은 교사(교회)의 전유물이 아니라, 부모(가정)와 교사(교회)가 함께하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온라인 가정예배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서학습, 공과교육이 신앙교육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재발견하게 했고, 신앙교육이란 교회와 가정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전인교육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또한 김영래도 분주한 삶 속에서도 “‘가족식탁’에서 가족 신앙교육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코로나로 인해 가정에서의 식사가 빈번해지고, 온종일 집 안에 거주하는 ‘집콕족’들이 늘었다. 온라인 개학과 재택근무로 인해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 점심 먹고 돌아서면 저녁이라는 ‘돌밥돌밥’의 현실에서 ‘설거지옥’에 시달리고, ‘살천지’ ‘확〜찐자’가 되어 ‘코로나 비만’ 에 이르렀지만,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가 가능해졌다. 밥상머리에서 나누는 신앙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식탁’은 가족 구성원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축복의 자리, 뗌(희생)의 자리, 나눔의 자리로 변하게 된다(2016, pp. 404-405). 또한 가족식탁이 ‘제단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면서(박종신, 2017: 황병준 • 김지숙, 2018, p. 220 재인용) 부모는 ‘영적 안내자’이자, ‘신앙의 멘토’로서의 역할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이규민, 2013, pp. 160-161). 그러므로 신앙교육은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족은 신앙교육이 시작되고, 완성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김영래, 2016, p. 423).


전염병의 확산 방지를 위해 예배당에서의 모이는 예배가 금지된 지금, 오히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가정예배’ 를 ‘홈 에듀케이션 (home education)’의 하나로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집단 활동으로 인한 전염병 감염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유로 최근에는 교회에서도 다양한 언택트 기술을 활용하여 홈 에듀케이션을 실시하고 있다. 일반교육 영역에서는 소위 홈 에듀케이션의 일종인 ‘무크’(MOOC)와 같은 온라인 수업과 오프라인 공간에서 온라인을 활용하는 ‘블렌디드 러닝 ’(blended learning)은 이미 익숙하다. ‘MOOC’는 대규모 온라인 공개수업을 뜻하는 ‘Massive Open Online Courses’의 약자로, 간편하게 '무크’ 라고 불린다. 무크는 2011년 가을 학기에,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교수들이 ‘오픈 클래스 룸’(open classroom)이라는 온라인 학습 포털을 통해 수업을 제공하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무크는 시작부터 교육자에게서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Haber, 2016, 抑. 14-15). ‘블렌디드 러닝’ 은 학습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교육, 그리고 다양한 학습방법을 혼합한 학습방법을 말한다.


지난 1학기에 초중등학교와 대학에서 급작스럽게 온라인 개학을 했지만, 비교적 빠르게 안정화될 수 있었던 까닭은, 우리나라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초고속 통신망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거의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이 디지털 기기 사용과 영상 콘텐츠에 이미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교회의 신앙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많은 교회가 온 가족이 함께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하고 있으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택트 시대 예배의 중요성과 그 교육적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고자 한다. 



IV. 언택트 시대 예배의 교육적 의미


앞서 살펴본 것처럼, 언택트 시대의 신앙교육은 대면과 비대면,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결합된 다양한 방식의 예배와 교육활동, 즉 비대면을 넘어 ‘다면(Multi-faceted)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것은 팬데믹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기도 하지만, 언제 이런 일이 또다시 닥칠지 모르고, 언택트 트렌드에 익숙해지고 나면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러한 언택트 예배와 다면화된 신앙교육을 뉴노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예배의 본질과 예배의 본래적 존재 의미를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배는 칼 바르트의 말처럼, “그 자체를 위하여 수행 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유익을 위하여 예배하려 할 때 그 행위는 이미 예배 본질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임영택과 나형석(2014)도 예배를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 사이에서 생겨나는 만남의 사건”으로 정의하면서, 교회교육과 신앙교육은 예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예배는 교회교육, 신앙교육의 핵심이면서 동시에 신앙교육이 일어나는 ‘장’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장’이 존재하지 않는 온라인예배, 비대면 예배는 신앙교육과 교회교육의 유용한 도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예배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만남과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교육적 행위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초고속 통신망과 촘촘한 소셜네트워크로 인해 언택트와 ‘패스트’(fast)가 일상이 되면서, 우리의 사회는 점점 빨라졌고, 패스트 문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사회학자인 조지 리처(George Ritzer, 2004)는 이러한 현상을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신앙도, 교회도 패스트를 추구하는 맥도날드화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맥도날드화는 “패스트푸드 매장이 미국 사회의 각 구획은 물론 전 세계를 잠식해 가는 원리에 의한 사회현상” 을 지칭하는 말로, 효율성(efficiency), 측정가능성(calculability),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 그리고 통제성(control)이라는 4가지 특징을 가진다(Ritzer, 1993: Smith & Pattison, 2014, pp. 25-26 재인용).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오너리(Carl Honors)의 지적처럼, 그 동안 우리는 빠른 것이 항상 좋다는 “빠름에 대한 맹신”(the cult of speed)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Honors 2004, p p. 14 - 15). 그러다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패스트가 아닌 ‘슬로’ (slow)에 대한 욕구를 일깨웠다. 오너리에 의하면, 바쁘고, 호전적 이며, 서두르고, 통제하고 제압하려는 삶의 방식이 ‘패스트’라면, 이와 반대로 ‘슬로’는 침착하고, 차분하며, 매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수용적이며,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삶의 방식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언택트 트렌드가 신앙의 영역에까지 들어왔지만,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패스트(fast)가 아닌 슬로(slow) 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 ‘슬로처치’


교회는 목회자 홀로 운영하는 1인 기업이 아니며, 목회자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1인 퍼포먼스를 우리를 예배라 부르지 않는다.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 어우러지는 ‘만남의 사건’ 이며, 그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는 ‘현장’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택트 시대의 교회는 “신자들이 수동적인 영적 소비자로 머 무는 교회” 가 아닌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지구보다 크고, 우리 집 앞마당만큼 친숙한 신앙 이야기', 즉 하나님의 창조, 예수의 복음, 성 령의 사역 등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신앙의 공동생산자가 되 어,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로 참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Smith & Pattison, 2014, p. 36).


크리스토퍼 스미스와 존 패티슨(2014)은 『슬로 처치(Slow Church:Cultivation community in the patient way of Jesus)』에서, 이러한 교회를 '슬로 처치’ 라고 하면서 슬로 처치의 비전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슬로 처치의 가장 중요한 비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화해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고, 모든 피조물이 각자가 부름 받은 자 리에서 함께 성장함으로써 샬롬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데 있다. (Smith & Pattison, 2014, p. 57)


그러므로 온라인예배에 접속하고, 예배를 시청한다고 해서 온전한 예배를 드렸다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인간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기를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비대면이 아니라, 언택트 기술을 활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다면적 예배 그리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다면적 참여가 가능한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온라인 비대면 예배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2. ‘슬로 에듀케이션’


언택트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그동안 해오던 일방적인 ‘티칭’(teaching)에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교육하고,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코칭’(coaching)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언택트 기술을 활용한 ‘다면(multifaceted) 신앙교육’, ‘슬로 에듀케이션’ 이라 할 것이다. 슬로 에듀케이션은 일반교육의 영역에서 먼저 시작되었지만, 슬로 에듀케이션이 지향하는 바는 신앙교육에도 매우 유의미하다.


먼저 신앙교육은 ‘질문을 유도하고 성찰을 끌어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현재 코로나19 상황에서 거의 대부분 교회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나마 소셜네트워크와 온라인 콘텐츠를 갖춘 교회에서는 온라인 비대면 신앙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다분히 시각적이고, 일방적이다. 그러므로 가정예배를 통해, ‘가족식탁’을 통해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을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개 교회에서는 단순히 온라인 영상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제안하고, 언택트 기술을 활용하여 개별 피드백이 가능하도록 하며, 개인과 가정의 환경에 따른 맞춤형 신앙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물리적 공간 구성’이 중요하다.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다양한 콘텐츠들은 신앙교육을 돕는 보조재이지, 그것이 예배와 신앙교육을 대신할 수는 없다. 가정에서 온라인예배를 드릴 때도 가능한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집안의 한 장소를 정하여 가족이 함께 제단을 만드는 것은 신앙교육의 측면 에서도 매우 유익하며, 제단보 등을 깔아 예배를 위한 단상을 꾸미고, 그 위에 십자가와 양초, 성경책 등을 올려두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친밀한 가족들끼리 집안에서 드리는 가정예배라고 해서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복장의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세 번째는 ‘정해진 시간’이다. 비대면 예배를 시행하면서 실시간으로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고, 녹화된 영상을 미리 제공하여 언제든 원하는 때에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교회도 있다. 온 가족이 가정에서 온라인예배를 드릴 때는 가능하면 주일 오전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 부득이한 경우라면, 가족의 사정에 따라 예배시간을 조정할 수도 있지만, 어린 자녀들이 있다면, 특별한 이유 없이 예배시간을 변경하거나 요일을 바꾸지 않은 것이 좋겠다. 너무 교조적일 필요는 없지만, 아직 신앙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많은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혼란을 주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함께 예배하는 이들의 태도’ 이다.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이것은 신앙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온라인예배나 영상예배를 드리더라도 이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심을 믿고, 경건한 마음과 자세로 예배에 임해야 할 것이다. 혹 미리 주어진 예배문이나 주보를 가지고 예배할 때에는 가족 구성원들이 예배 사회, 기도, 찬양 등을 맡아 미리 예배를 준비하는 것도 좋겠다. 



V. 나가는 말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하고 있는 코로나19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온 나라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거리, ‘영적 거리’마저 벌려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백소영,2020, p. 161). 언택트 트렌드는 이미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뉴노멀이 되었고, 교회의 친밀한 존재 방식이 지금은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거부되고 있지만, 인간은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으로 단절하고 피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삶도, 공동체도 유지할 수 없다. 언택트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하고 줄여도 아무 지장이 없도록 만드는 것” 즉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개별 교회들이 시도하고 있는 다양한 언택트하고 뉴노멀한 존재 방식, 예를 들면 다양한 형태의 온라인예배와 드라이브 스루를 활용한 온라인 성만찬, 온라인 가정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위한 슬기로운 집콕예배 등은 이후 하나의 ‘공동체 생존 모델’ 로 주목받게 될 것이다.


물론 언택트 시대에도 예배의 의미와 본래적 가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온라인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매우 고무적이며, 의미 있는 작업이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아 부딪치게 될 신앙적, 종교적, 신학적 질문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논쟁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언택트 사회에서는 당연했던 것 중에 문제가 될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는 김용섭의 말처럼, 팬데믹과 언택트 시대를 맞아 한국교회는 이전의 방식을 더 이상 유지할 수없는 위기와 도전 앞에 서 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신앙을 위해 무엇을 과감히 내려놓고, 무엇을 용기 있게 시작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껏 그래 왔듯 한국교회는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고, 이 순간을 무사히 헤쳐 나가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다시 힘을 내어 예배로 돌아가야 한다. 코로나 시기에도 결코 예배와 신앙교육을 멈출 수 없고,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폴 투르니에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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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Worship and Faith Education in an Untact Society: Toward Multifaceted Education beyond the Untact Education


Eun-kyoung Lee (Visiting professor,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Thomas Friedman’s saying has become no longer a predirtion but an established fact that the world history is divided into B.C., which means “Before Corona,” and A.C., which means “After Corona.” Some use the wordings like “Anno Diseasew or “Anno Depresionis,” following the notation of ‘A.D’, which originally means anno Domini’ Or, others transcribe ‘A.D’ s Anno Domi, following domus, which means home, family, or nation. This puts stress on the current covid-19 landscapes of self-quarantine, border closures, and the national control of the pandemic. Whatever one call this age, one cannot deny that the pandemic has turned the abnormal or the exceptional, into the new normal as a new quotidian life. As our ordinary life has been changed into a form of the new normal, our desire would undergo a change. Then, this changed desire will in turn modify our ways of living in quotidian situations. This new normality, in which disembodied and digitalized gatherings are part of our quotidian lives, can be called an untact age.


The ‘untact’ has become a kind of trend of this age, and churches and Christian education are not exceptions. Chapels andchurches of Catholicism and Protestantism have been closed the first time in 200 years since the introduction of Christianity into the Korean peninsula, and they had the unprecedented experience of the online worship service. In this untact age, one needs to critically reflect on what liturgical service and worship really are and how faith education should be.


Under these problematics, this paper briefly took a look into the features of this untact age triggered by the covid-19 pandemic and paid its atten社on to how the pandemic has changed our ways of relations and meetings. Then, this paper proposes the multi-faceted way as a new paradigm of faith education beyond the untact manners, describing how multi-faceted worship services and eucharist have become. Also, taking this covid-19 crisis as a chance to reform our worship, I seek for a way to get back our faith education in home worship and family meal table, and thus for a way of worship for those who stay at home all day. Lastly, I tried to describe the meaning of the untact worship service from the viewpoints of slow church and slow education.


Key words: COVID-19 pandemic, untact, multifaceted, home worship, family meal table, uncontact divide. 


투고접수일: 2020. 09. 09

심사개시일: 2020. 09. 12

게재승인일: 2020.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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